방학은 끝났지만 숙제는 남았다

by 눈 비 그리고 바람

8월의 태양에 목덜미가 뜨겁다.

오른쪽 어깨에 채집망을 비스듬히 걸쳐 멨다. 따사로운 햇살이 그 사이로 부서져 내린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서 하늘을 원망스럽게 올려다본다. 짧은 탄식 사이로 긴 한숨이 겹쳐진다. 영원할 것만 같던 방학의 끝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괜찮을 것이라는 안도보다 게으름을 경계하던 불안함이 앞서기 시작한다.


아직 3일 남았다. 지금이라도 하면 된다는 말을 중얼였다. 그 뒤에는 ‘진작에 하고 놀걸’과 같은 탄식도 조심스레 따라붙었다.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그림일기 10개, 탐구생활 20장, 곤충채집 후 박제. 그러고 보니 탐구생활 앞장에 하루 일과표마저도 그리다 말았다. 악을 쓰고 울어대던 매미소리가 한산하기만 하던 놀이터를 더 황량함으로 채우고 있었다. 아파트 단지에도 개학의 공포가 드리웠음이 분명했다. 매미소리가 이렇게 컸었던가, 그 소리의 크기만으로 숙제의 무게를 떠올렸다.


저 멀리서 같은 반 친구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피리 부는 사나이가 모든 아이를 휩쓸고 간 것이 아니라는 반가움도 잠시. 그도 채집망을 든 채 울상을 짓고 있었다. 나와 같은 처지임을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내가 먼저 물었다.


“방학숙제 다 했냐?”

“아니 하나도 못했는데”

“니는?”

“나도 하나도 못했다”


둘은 한참을 더 이야기했다. 후회와 원망을 저울질하며 스스로의 처지를 한탄했다. 이렇게 마음이 잘 맞던 친구가 아니었는데. 서로의 게으름이 위안이 될 수 있다며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는 약간씩 원망과 탄식을 주고받으면서도 앞으로의 사태에 대해 희망론으로 일관했다. 순간 친구의 채집통에서 푸르륵 소리가 났다. 잠자리가 날갯짓을 하자 그 안에 있던 모든 곤충들이 일제히 날아오르기 하기 시작했다. 어림잡아도 대여섯 마리는 족히 되는 듯했다. 내 채집통은 잠자리 한 마리가 전부. 그것도 날개 한쌍이 떨어지는 바람에 박제가 될 상은 아닌 듯했다.


“나 매미랑 메뚜기 한 마리만 주라”

“너 2마리만 하면 되잖아”


평소 같으면 절대 나눠줄 의향이 없었을 그다. 잠시 생각하더니 바로 행동으로 대답했다. 채집통에 문을 열고 매미와 메뚜기를 동시에 낚아챘다. “너 가져” 순간 눈물이 핑 돌 것 같았다. 이러려고 그와 대화를 한 것은 아니자만, 뜻밖에 날아든 호의에 어쩔 줄 몰랐다. 그도 같은 처지에 대한 불안이 조금은 해소되었던지 2마리를 주고도 잠자리 한 마리를 더 내어 주었다. 서로는 한참을 웃으며 돌아섰다. 단호한 그의 뒷모습을 보며 할 수 있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집으로 돌아와 스티로폼을 찾았다. 엄마가 간장게장을 포장해 오던 날 봤던 스티로폼 통을 기억하고 있었다. 통 안에서는 바닷소리와 짠 냄새가 아직도 갇혀있었다. 냄새만큼이나 짭조름한 게장을 떠올리며 뚜껑을 가위로 오려냈다. 옷핀을 가져와 곤충을 매달아야 했다. 통에 갇힌 곤충을 잡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지만, 아직 발버둥 치는 곤충 가슴에 대못을 박는 것은 쉽지 않았다. 얼마나 아플까에 대한 감정이입 때문인 듯했다. 비록 얻어온 아이라는 점에서 조금의 죄책감은 덜어내려 했다. 그날 살생과 의무를 저울질하다 결국 못을 박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일기장으로 눈길을 돌렸다. 손때 묻은 헐거움으로 가득해야 할 일기장이 새것처럼 빳빳했다. 덜덜거리던 선풍기 앞에 베개와 일기장을 차례로 던졌다. 엎드리며 베개를 가슴팍에 밀어 넣었다. 비장한 표정으로 날짜와 요일 날씨부터 적기 시작했다. 8월 5일 맑음, 6일은 흐림?, 7일은 주말이니까 맑음으로 하자 다음날은? 에라 모르겠다 맑음 2번에 흐림 하나 비 하나로 통일? 이렇게 투덜대며 글자를 그림처럼 새겨나가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찝찝함이 다급한 듯 나를 흔들어 깨웠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떴다. 날짜는 개학날 아침으로 맞춰져 있었다. 겨우 버틸 수 있었던 3일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0으로 수렴한 순간, 겨우내 참아왔던 억울함의 끈이 끊어지고 말았다. 참아왔던 울분이 목구멍을 통해 솟구쳤다. 엄마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며칠간 잠들었는데도 깨우지 않았음을 원망했다. 엄마는 모든 것은 니 책임이라는 표정으로 어이없다는 듯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커다란 대못이 날아와 내 몸을 관통하는 기분이 들었다.


“고만 자고 밥 먹어~”


불현듯 날아든 독촉에 뜬눈으로 또 다시 눈을 떴다. 순간 아파트 곳곳에 금이 가더니 새하얀 빛을 뿜기 시작했다. “허~억” 거친 날숨 뿜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쩌억하고 멀어지는 일기장이 툭하고 떨어졌다. 침을 얼마나 흘렸던지 일기장에는 남아메리카처럼 생긴 대륙이 놓여 있었다. 시간은 얼마나 지난 것일까. 선풍기, 베개, 일기장, 심이 부러진 연필, 6시를 가리키는 시계까지. 고소한 밥냄새를 맡고서야 겨우 현실로의 귀환을 믿을 수 있었다. 전의를 불태운 지 고작 30분 만에 패잔병이 된듯했다. 개학 전까지 모든 숙제를 다 할 수 없을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하루 하고도 이틀을 더 꿨던 꿈이 개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모든 기대는 처참히 무너졌다. 결국 방학은 끝이 났지만 숙제는 그렇지 못했다. 개학을 하고도 며칠 동안 그날의 악몽에 시달렸다. 속절없이 시간은 흘렀다. 그해 여름 이후로도 방학은 지쳐갈 때쯤 어김없이 찾아왔고, 개학은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내 등을 밀어붙였다. 완벽하게 숙제를 끝내본 기억은 별로 없다. 내 일기장은 날조된 날씨와 급하게 갈겨쓴 글자, 잠결에 흘린 침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마흔을 훌쩍 넘겨버린 지금도, 나는 가끔 꿈속에서 빳빳한 일기장과 마주하곤 한다. 채우지 못한 칸들이 실적이 되어, 마감이 되어 돌아왔다. 나를 압박할 때마다 여전히 팔다리를 휘저으며 식은땀을 흘리며 깬다. 이제는 안다. 억장이 무너질 것 같은 악몽이라도 언제나 나를 구원했던 건, 다만 며칠이라도 남아있을 현실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였다.


침 자국이 선명한 일기장을 덮고 일어나 고소한 밥 냄새를 따라가던 그때처럼, 지금의 나를 살게 하는 것도 결국 대단한 성과가 아닌 ‘지금 이 순간’ 일지 모른다. 숙제는 여전히 산더미지만, 개학날의 악몽은 잠시 접어두기로 한다. 아직 내 인생의 본격적인 방학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그때가 되면 미리 곤충도 박제하고, 일기도 매일 쓸 수 있을 것 같다. 며칠 남지 않은 현실과 마주하더라도 덜 억울하겠지. 정말 그날이 온다면 말이다.

목,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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