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원 그리고 승차권 30장

by 눈 비 그리고 바람

뒷덜미를 따라 식은땀이 흐른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다. 골목길에는 인기척은 고사하고 귀가 아플 정도의 적막만 있을 뿐이다. 무척 원망스러웠다. 목덜미를 잡혀 끌려가면서도, 이러다 큰일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말로만 듣던 삥 뜯는 나쁜 일진인가? 당장의 두려움보다는 왜 하필 내가 대상인가에 대한 푸념만 가득하다.


“야, 너 일로 와.”


골목 모퉁이를 돌자마자 날아온 한마디. 혹시 모를 기대에 뒤를 돌아봤지만, 역시나 불길한 화살은 나를 비껴가는 일이 없었다. 손가락을 까닥거리는 그를 향해 입을 삐죽거리며 다리를 끌었다. 처음 당해보는 일방적인 호객에 다리는 후들거렸다. 이가 서로 부딪히며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뇌를 흔들었다. 너무 긴장한 탓에 생각이 많아졌다. 걷는 동작마저 의식의 범주에 들어가는 바람에 팔과 다리가 동시에 나갈 뻔했다.


사춘기를 지탱하는 자존심 때문인지 반발심이 두려움을 밀어내고 있었다. 무심코 친구 쪽을 바라봤다. 그는 아무 말없이 묵묵히 걷고만 있다. 도덕 선생님의 빼곡한 판서를 대하는 표정으로 그저 앞만 바라볼 뿐이다. 검도를 배우던 그가 오늘따라 무척이나 듬직해 보였다. 어쩌면 서로 합심해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친구를 향해 눈으로 보낼 수 있는 신호는 모조리 발사했다. 그리고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로 화답했다. 영웅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인지 발걸음은 그리 무겁지 않았다.


생각이 많은 것은 일진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우리는 두 명이고 그는 한 명, 더군다나 키도 우리가 훨씬 컸다. 그가 유리한 것이라고는 세월을 등진 듯한 어두운 얼굴뿐이었다. 교복만 보고 불러 세운 것을 탓하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무 말 말고 따라와.” 그는 나와 친구 사이로 들어와 어깨동무를 했다. 일진의 작은 체구가 계속 자존심을 슬쩍슬쩍 건드렸다. 나는 은연중 위협을 가하고 싶었던지, 목덜미에 매달리다시피 한 그를 향해 괜히 더 어깨를 치켜들었다.


“야, 웃어.”


지나가던 할머니를 보고 그가 외친 말이다. 고개를 들어 도움을 청하고 싶었지만, 유모차만큼이나 굽어버린 할머니의 허리가 눈에 들어왔다. 바닥을 향해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고물이 가득 실린 유모차를 곁눈질로 흘기며 그토록 바라던 인기척의 아쉬움을 뒤로했다. 그때 큭큭 하고 웃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친구가 일진의 품에서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그는 입꼬리를 말아 올린 채 겨우 웃는 소리만 내고 있었다. 어이가 없었던지 나도 모르게 콧방귀를 뀌고 말았다. 앞으로 펼쳐질 운명이 복선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스스로 살 궁리를 해야 했다. 주머니 속 너풀거리는 몇 장의 지폐를 움켜쥐었다. PC방 갈 요량으로 가지고 있던 돈이었다. 어느새 회백색 콘크리트 벽이 키만큼 무성한 골목길에 다다랐다.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전봇대 아래 무심하게 부서진 연탄재뿐. 주변을 기민하게 둘러보는 일진의 모습에 그가 자주 오는 곳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야, 얼마 있냐? 다 털어봐.”


불현듯 떠오른 기시감에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몹쓸 인상의 늑대가 털만 무성한 양을 불러놓고 무슨 말을 할 것인지는 당연지사겠지. 나는 겁먹은 얼굴에 난감한 표정을 포개어 그를 쳐다 보였다.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시간을 끌고 싶었다. 제발 누군가 지나가길 염원하면서. 잠시 후 부산스러운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친구는 가방을 전봇대 옆에 가지런히 벗어둔 채, 거의 바지를 벗을 기세로 주머니를 뒤집고 있었다. 친구의 낮은 중얼거림은 조금 남겨두었던 기대의 풍선에 바람을 빼고 있었다.


“아, 여기 있었는데. 엄마가 오늘 아침에 줬는데 어디 갔지?”

“잠시만요, 좀 찾아보고 드릴게요.”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그간 쌓아둔 얄팍한 우정까지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신을 잡아먹겠다는 늑대를 위해 살까지 발라주려는 격이 아닌가. 친구의 뜻밖의 호의에 일진 또한 주춤했다. 친구는 갈수록 격하고 떠들썩하게 주머니를 뒤지는 통에 보는 사람마저 불안하게 만들었다. 잠시 후 일진이 손사래 치며 한마디 던졌다. “급한 거 아니니까 천천히 찾아.” 이 한마디에 뜯기고 있다는 상황의 긴박함은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 목구멍을 태울 듯 찔러대던 긴장감이 조금씩 풀어지고 있었다. 그 틈새로 약간의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입을 틀어막은 채 겨우 웃음을 참았다. 친구에게 말을 건넸다. “천천히 하래잖아, 숨 좀 돌려.” 일진은 내 말에 수긍이라도 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숨만 가쁘게 내쉬었다. 이대로 둔다면 주머니가 없는 곳도 다 털어서 보여줄 기세다. 친구는 일진 눈치도 봤다가 내 표정도 살폈다가 하늘도 올려봤다. 심한 내적 갈등에 몸부림치는 듯했다.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친구의 고장 난 모습에 오히려 나는 점점 이성을 찾아가고 있었다. 나라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었을까. 온몸을 삐거덕대며 흔들어대던 떨림은 잦아들고 숨소리도 고르게 오갔다. 순간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어쩌면, 친구는 적극적으로 찾는 척하면서 시간을 끌려는 것 아닐까? 친구의 번뜩이는 책략에 탄복했다. 지금까지 보여줬던 허당미가 다 사전에 예정된 것이라 생각하니 약간에 소름이 돋았다.


나도 홀린 듯 부산스러움에 동참했다. 아무 곳이나 찾는 척했다. 바지 주머니 깊숙한 곳에 지폐를 끼워두고, 주머니를 긁어서 보여주는 척했다. 일진도 서서히 의욕을 잃고 있었다. 두 명이서 호들갑 떨며 뒤집는 통에 누가 봐도 돈을 뺏는 상황임을 알 수 있었다. ‘야, 그냥 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것 같았다. 침을 몇 번이고 삼키며 억지로 더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됐다’만 되뇌던 찰나, 친구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아! 찾았다! 여기 있어요!”

“돈 2천 원하고 회수권 30장이요!”


친구가 필통에서 천 원짜리 지폐와 돌돌 말아 고무줄을 채워둔 승차권을 지켜 들었다. 그간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팽팽한 탄복의 끈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있어도 못 주겠다는 식으로 일진과 친구를 번갈아 쏘아붙였다. 일진은 잠시 눈을 굴리더니 친구의 승차권과 현금을 뺏어 반대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근처에서 대문이 둔탁하게 열리는 소리가 났던 것 같았다. 우리는 덩그러니 골목에 남겨진 채 멈춰 있었다. 잠시 후 겨우 숨을 고르고, 바닥에 있던 가방을 주워 묻은 흙을 털어냈다. 친구는 안경을 치켜세우며 연신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와 씨, 뭐 저런 놈이 다 있노.”

“없다는데 끝까지 달라하네, 진짜 큰일 날 뻔했다.”

“내가 끝까지 못 찾았으면 어떡할 뻔했노!”


서로는 마주 보며 한참을 웃었다. 그 웃음이 안도의 기쁨 때문인지, 극도의 긴장이 훑고 간 육체의 허탈함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상납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과 오전 자율학습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뿐이었다.


지금도 한 번씩 그날을 회고하곤 한다. 그날 친구가 보여준 그 필사적인 '뒤적거림'은 비굴함이 아니라 가장 고단수의 생존 전략이었다는 것을. 마흔 중반을 바라보는 지금, 나는 여전히 세상이라는 거대한 골목길에서 이름 모를 일진들을 마주하곤 한다. 예기치 못한 시련이 내 뒷덜미를 낚아챌 때, 나는 이제 더 이상 떨지 않는다. 대신 친구가 그랬듯, 내가 가진 패를 진지하고 정성스럽게 나열할 뿐이다. 때로는 바보처럼 히죽 웃기도 하고, 때로는 가진 게 이것뿐이라며 당당하게 말하곤 한다.


우리는 여전히 무언가를 뺏기며 살아가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지켜낸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어느 날 시작된 그 비좁은 골목길에서부터.

목,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