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빛나는 밤에

by 눈 비 그리고 바람

“짜란~ 짜란~ 짜라란~”


익숙한 전주가 흘러나온다. 소리가 페이드아웃 되며 잠시간 정적. 그리고 다시 익숙한 별밤지기 목소리가 이어진다. 차분한 목소리만큼이나 복잡하던 생각도 가라앉는다. 공부니 숙제니 하며 학창 시절을 등수로 자리매김하던 시절, 여기저기 상처받은 마음에는 더 이상 빨간 약은 스며들지 못했다. 오늘도 이문세의 목소리는 지금 이 순간, 이곳에서 가장 필요한 감정과 음색으로 나를 채워주고 있다. 라디오가 주는 싸구려 스피커 음질은 모나고 흐트러진 내 마음에 넌지시 스며들기 적당했다. 마치 치열하던 오늘에 대한 끝을 닫아주려는 주문 같기도 하다.


정확하게 10시 5분이 되면 별이 빛나기 시작한다. 하루 중 가장 기다리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문세의 주옥같은 멘트를 들으며 오늘을 되짚어본다. 이름을 부르면 꽃이 되는 것처럼 무심코 지나쳤던 일상도 그의 낮은 음성을 만나면 채색된 추억으로 알알이 떠오른다. 얼굴을 붉히다가, 쿡쿡 웃다가, 누군가를 용서하다가, 시큼하게 올라오던 서러움 때문에 이불속으로 도망쳐 잠들기도 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감정에 도피처가 없는 가장 솔직한 찰나일지도 모르겠다.


“긴 하루가 또 저물었습니다. 누군가는 곤히 잠들어 있을 시간, 하지만 우리들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죠. 12월의 어느 날 밤, 별이 빛나는 밤에”


밤은 이미 깊었다. 창은 세상이 주는 찬란함뿐만 아니라 까맣게 타버린 빛깔도 고요할 수 있음을 암시하려는 듯했다. 이불속, 움직일 때마다 두터운 이불에서 서걱대는 소리가 났다. 때때로 엄마 냄새가 스민 따스한 바람이 훅하고 불어오기도 했다. 간단한 별밤지기 멘트 뒤에는 반드시 선곡이 나온다. 베개에서 머리를 든 채 정지된 모습으로 라디오를 응시한다. “양파가 부릅니다 애송이의 사랑” 이불 안에서 낼 수 있는 가장 빠른 움직임으로 손을 뻗었다. 플레이 버튼과 녹음 버튼은 눌러야 하는데, 먼저 마중 나온 한 손으로는 역부족이다.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깔리는 중이다. 두 손을 꺼내 겨우 녹음을 시작한다. 이번에는 제발 간주 중에 멘트 남기지 말고, 노래 끝나기 전에 광고 넣지 말라며 볼멘소리를 냈다.


여전히 나른한 밤, 닫힌 방 안으로 캄캄한 노래가 희끄무레 채워진다. 이대로 잠들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음량이다. 혹시 모를 허기에 대비해 가져온 귤 서너 개는 이미 껍질만 벌어진 채 침대 옆 탁자 위에 풀어져 있다. 지금 이 시간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그 때문인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모두 상상에 맡길 수 있다. 하루 중 가장 사적이면서도 함부로 부끄러울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창문에는 누군가 입김을 불었는지 뿌옇게 흐린 유리 사이로 작은 물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감기 조심하세요” 아, 망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2절 후렴구 전에 소리가 서서히 페이드 아웃되더니 갑자기 감기를 조심하란다. 손쓸 방도가 없었다. 서둘러 녹음 정지 버튼을 눌렀지만 감기약 광고는 이미 끝을 치닫고 있었다. 침대 위로 몸을 던지듯 누웠다. 이마에 손등을 짚고서 한숨을 쉬었다. 몇 번의 긴 날숨 때문인지 조금이나마 아쉬움을 몰아낼 수 있었다. 아쉬움이 지나자 겨우 감춰두었던 하루의 피곤이 몰려왔다. 하는 수 없이 오늘의 끝을 가늠해 본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무게가 눈꺼풀을 짓눌렀다. 라디오를 꺼야 한다는 의식은 있었지만, 어떻게든 눈은 감겨왔다. 조금씩 희미하게, 밤과 새벽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하루는 오늘도 어물쩍 넘어가고 있었다.


다음날, 학교 가방을 챙기다 책상 위 널브러진 마이마이가 눈에 들어왔다. 이어폰을 둘둘 말아 가방에 넣고 배터리 여분도 챙겼다. 그렇게 방문을 나서던 찰나, 라디오는 아직도 혼자서 돌고 있었다. 서둘러 뛰어가 전원을 끄면서, 안에 있던 테이프를 꺼냈다. 어제 녹음했던 노래를 야자시간에 무한정 들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얼마나 공부가 잘 될 것인가 보다는 얼마나 감성에 젖을 수 있을지를 궁리했다. 그때를 위해 상상 속 펼쳐야 할 감정의 보따리들을 꺼내두어야 했다. 얼마나 과거의 추억까지도 소환해야 할지와 같은 고민은 언제나 행복하다는 감각을 두 손 가득 쥐어 주었다.


어쩌면 우리네 테이프도 아직 녹음되고 있을지 모른다. 좋은 기억도 지나고 나면 한낱 일상에 불과할 수도 있고, 고통과 아픔에 몸서리치던 순간도 지나고 나면 오늘을 살게 하는 그리움이 되기도 한다. 살아보니 호오를 나누려는 의지가 더 큰 고통을 불러오기도 했다. 녹음해야 할 순간과 정지해야 할 때를 구분하려 애썼지만, 결국 그 모든 게 하나의 테이프에 담긴 내 인생이었다. 감기약 광고가 섞여 들어가 본들 어떤가, 어차피 가장 나다운 테이프일 것인데. 잡음이 섞이면 섞인 대로, 멜로디가 좋으면 좋은 대로. 나는 오늘도 내 인생의 녹음 버튼을 붉게 켜둔다.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이 삶의 소리가 훗날 누군가에게는 꽤 괜찮은 옛 노래로 기억되기를 바라며.

목,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