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이 밤에 책장을 넘긴다고?
그때만 해도 이런 뜬금없지만 오싹한 소문이 돌았다. 우리 초등학교 건물 앞에는 동상이 2개 있다. 하나는 소녀와 소년이 벤치에 나란히 앉아 책을 같이 읽고 있는 동상. 다른 하나는 세종대왕이 근엄하게 앉아 한 손에는 책을, 다른 한 손에는 널리 알려라 같은 손동작을 하고 있다. 지금 생각하면 세종대왕은 초등학생에게 소문 퍼트릴 시간에 책이라도 더 보라는 말을 할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 같다. 모든 소문의 시작은 그 2개의 동상으로부터 비롯된다.
“니 그거 아나?”
“세종대왕 밤 12시만 되면 책장 넘긴다 카든데, 책 다 넘기면 우리 학교 폐교된다 카더라”
“아니다, 피눈물 흘리면서 운다더라”
“둘 다 고마해라 또 실없는 소리 한다”
그 둘은 반에 헛소문의 먹구름을 몰고 다니는 부류였기에 처음부터 진심을 담을 필요가 없었다. 한 귀로 들어와 나가는 것에 대해 가공하지 않은 대꾸만 던질 뿐이다. 나도 약간에 호기심은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다음날 또 다른 친구가 호들갑 떨며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바로 밤 12시만 되면 책을 읽고 있는 소녀상이 눈물을 흘리며 운동장을 뛰어다닌다고. “허~ 참” 짧지만 예사롭지 않은 탄식이 가슴 깊은 곳에서 툭 하고 튀어나왔다. 서늘함이 팔에 살포시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따라 팔에 난 솜털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말을 듣다 말고, 목에 걸린 이물감 때문에 침을 삼켰다. 차분하면서도 조용히 아우성치는 감각 때문에 가슴 중간이 간질간질했다. 살며시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거짓과 진실은 서로 반대 같아도, 따지고 보면 비슷한 구석이 있다. 거짓을 진심이라고 믿기는 어려워도 믿게 되면 큰 희열 같은 감정을 동반하니까. 옅은 호기심으로 쌓아 올린 세상이 베일을 벗겨지는 순간이다. 곧 일식이 온다거나 하늘이 열리고 별이 떨어질 것만 같은 장면으로 눈앞이 아른거린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소리 때문에 잠시동안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게 앞만 응시했다. 차라리 누군가 나타나 모두 다 거짓이라 했으면 했다. 스스로 뛰어든 거짓과 진실, 공포와 호기심 사이에 느끼는 호사스러운 감정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설령 모두 거짓이라 하더라도 동상이 움직이는 상상을 한다는 것은 꽤나 흥미진진한 일이기도 하니까.
한 번은 그냥 넘길 수 있었는데, 두 명 세 명이서 그런 이야기를 하자 점차 믿어야 할 것 같았다. 온 동네가 동상 이야기로 떠들썩하다. 홍콩할머니귀신 소동 이후 처음인 것 같다. 다음날도 또 그다음 날에도 온갖 소문과 이야기들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소년과 소녀가 손을 잡다가 갑자기 뽀뽀까지 한다고. 서로 같이 들었는데, 현장에서 괴담이 희극이 되는 것을 보며 혼자 큭큭 웃기도 했다. 그간 조그맣게 쌓아두었던 기정사실이 조금씩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모두 거짓이다는 생각이 들자 이제는 즐기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모르긴 몰라도 구전으로만 전해져서 그런 듯했다. 지금은 SNS 같은 시스템이 있어서 타인의 말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지만 그때는 스마트폰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장난기 충만한 초등학생이 말하고 듣고 또 실없이 웃으며 농짓거리로 늘여놓는 이야기에 신빙성이 있을 리 만무하니까. 이것이 반복되자 이야기는 개개인의 창의력을 따라 마구잡이로 각색되기 바빴다. 누구나 동상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었고, 위증을 하더라도 처벌받을 이유가 없었다.
며칠 뒤, 반 아이들 모두는 저 나름대로의 거짓말쟁이가 되어 있었다. 이제 헛소문을 몰고 다니는 친구들은 발 붙일 곳이 없어지자 자기가 밤에 와서 봤다고까지 주장하는 중이다. 참 한심하면서도 재미있는 친구라 생각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서로 책상을 붙이기 시작했다. 저마다의 방법과 친밀함에 따라 그 형태와 모양이 가지각색이다. 나도 앞자리 친구 둘과 책상 2개를 붙이고는 아직도 뜨근한 김이 피어나는 보온도시락을 풀었다. 그리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야야, 너희들 들었나?”
“옆반에 종수가 밤 12시에 운동장에 왔다던데 세종대왕이 없다카든데”
서로는 서로를 보며 깔깔거리는 중이다. 나는 국 때문에 미즈근하게 데워진 김칫대를 씹으며 교실 창 밖을 응시했다. 저 멀리 보이는 두 개의 동상의 뒷모습이 보인다. 운동장에 하얗게 내리는 눈발 때문에 오늘따라 더 청승맞게 보이기까지 하다. 그들은 우리가 날마다 이렇게 떠벌리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기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