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폴로 눈병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눈이 가려우면 긁지 말고 바로 병원으로 가서 진료를 받아야 합니다. 또한 의심증상이 있으면 학교나 직장에 가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일부 많이 확산된 학교에서는 휴교를 권장하고 있습니다."
휴교라는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어떻게 학교를 안 가? 눈병 걸렸다고 학교를 안 간다고? 살짝 비꼬는 투로 중얼였다. 엄마는 못 들은 척 걱정 어린 눈으로 9시 뉴스만 응시할 뿐이다. 아빠는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는데, 꼭 어린아이 눈빛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빠도 선생님이었지. 학교를 안 간다는 말에 가족 모두가 심란하다. 그 표정 이면에는 미묘하게 입장 차이가 있었다. 그럴 리가 없다는 식에 낯빛은 같았지만 현실이 되었을 때 표정은 전혀 달랐을 테니까.
과거에도 유행병이 종종 돌곤 했다. 그때마다 우리 반은 예외였다. 결국 뉴스에서만 떠도는 병은 전설처럼 입소문으로만 떠들 뿐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결석자가 있을 리 만무했다. 매번 그런 식이었다. 아이들 태생이 튼튼한 것인지 아니면 밖으로 나가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나갈 때마다 아이들과 마주치는 것을 보면 후자는 아닌 듯했다. 그때만 해도 놀이터 흙 주워 먹고 구정물 마시고 다니는 게 일상이었다. 아마 전자가 더 맞지 않을까 싶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는 안도 덕분에 약간의 현기증이 몰려왔다. 내 인생 땡땡이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덮쳤기 때문이다. 아폴로인지 암스트롱인지 모를 눈병도 그렇게 지나갈 것이라 확신하며 무심하게 뉴스를 응시했다.
다음날, 별생각 없이 학교에 갔다. 친구들이 교실 한쪽 구석에 모여 웅성이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한 친구가 책상에 엎드려 울고 있었다. 가끔씩 얼굴을 들어 대답을 했는데, 그때 한쪽 눈이 붉게 물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순간 옅은 탄식을 뱉었다. ‘아 저게 아폴로 눈병이구나’ 친구들이 서둘러 집으로 가라고 재촉했지만, 콧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를 훔치며 그럴 수 없다며 울먹이고 있었다. 선생님을 만나 보여줘야 한다며 고집부렸다. - 사실 집에 가라던 친구도 반대 입장이었으면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 모두는 그가 아폴로 눈병을 확신했지만 등교한 것에 대해서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었다. 그때는 아파도 학교에 가서 아파야 했고, 누워 있더라도 학교 양호실에 누워야 한다는 의식이 초등학생 저변에 깔려 있었다.
그 친구는 선생님이 오고 나서야 겨우 집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면서도 억울함, 왜 나만, 어색함, 못 들은 수업은? 같은 감정과 걱정을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모두 측은하게 바라보면서도 개선장군 보듯 부러워하는 시선은 운동장에서 교문을 지나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계속 그를 쫓았다. 다음날, 다른 친구 두 명이 귀가조치를 해야 했고, 그다음 날은 다섯이 충혈된 눈으로 교문 밖을 나가야 했다. 돌림병임에도 무조건 학교를 왔다가 확인을 받고 갔다. 지금은 전화 한 통이면 가능 한 결근이 당시에는 일단 등교 후 결정이라는 통념이 당연한 의무인 것처럼 깔려있었다.
격리된 친구들은 꼬박 일주일을 쉬었다. 그때 그들이 너무 부러웠다. 서로 접촉하는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나날이 감염자는 늘어갔다. 나는 손도 씻지 않은 채 눈을 비벼도 붉게 충혈되는 일은 없었다. 아침에 눈만 뜨면 화장실로 뛰어가 눈부터 확인했다. 너무나 맑은 흰자위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무언가 이상했다. 반에 20명 이상 걸리고 있는데 나는 왜 예외가 되는 걸까? 사태가 이쯤 되자 터무니없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친목 모임이라도 있던가 아니면 손만되면 아폴로가 터지는 전설의 철봉이 어딘가에 박혀있을 것이라고.
“야들아 들어봐라 이거 치약인데, 눈밑에 바르고 비비면 바로 눈이 빨개진다”
“그라믄 집에 갈 수 있는 거다”
어느 날 나와 비슷한 면역력을 지닌 친구가 헐래 벌떡 뛰어와서 외쳤다. 서로 반신반의하면서도 지금껏 아폴로 결근을 하지 못한 학생들은 그에게로 몰려들었다. 어제 학원에서 아는 형으로부터 들은 특급비밀이란다. 곧이어 그는 치약을 들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10분 뒤면 아침 조례가 시작되기 때문에 빠른 결단이 필요했다. 남자화장실에 대여섯 명이 모여 그를 둘러쌌다. 마법 시연을 구경하는 것처럼 그가 치약을 든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튜브에서 시퍼렇게 질려버린 치약이 밀려 나왔다. 저걸 입이 아닌 눈에 바른다 생각하니 그도 억장이 무너지는 것처럼 보였다. 모두의 기대를 받고 있었으므로 이제는 무를 수도 없었다. 그가 치약을 눈밑에다 바르고 비비는 순간, 악 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화장실 바닥에 넘어졌다. 자지러지게 소리를 지르며 악다구니를 쓰면서도 그는 "괜찮아, 괜찮아"라는 말만 반복했다. 고통보다 학교를 쉬고 싶다는 욕망이 더 컸던 것이다.
관전하는 이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화장실 앞을 지나가던 옆반 아이들도 기웃거리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모두가 교무실로 끌려가 반성문 3장을 써야 할 것이 분명했다. 우리는 서둘러 그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얼른 세수하고 양호실부터 가야 한다며 그를 몰아세웠다. 그는 부축을 뿌리치고 세면대로 가더니 얼굴을 파묻을 기세로 세수를 했다. 이윽고 거친 숨소리는 잦아들고 그가 얼굴을 들었다. 숨을 크게 몇 번 몰아쉬더니 감고 있던 한쪽눈을 살며시 떴다. 시뻘겋게 변해버린 흰자위에 검은 눈동자가 떠있었다. 방금 물어뜯겨 태어난 좀비처럼 그는 그르릉 거렸다.
그날 그는 모든 이의 함구령 속에 무사히 교문을 나설 수 있었다.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는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다음날 엄마와 함께 다시 교문을 들어왔을 때의 표정은 그렇지 못했다. 모든 후회와 고통을 되돌리고 싶다는 심정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치약을 바르고 문질렀다는 사실을 부모님께 들통나고 말았고, 퉁퉁 부어오른 종아리와 엉덩이도 함께 문질러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날 종례시간, 선생님은 친구의 실수를 그냥 지켜보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뜨끔했다. 그가 치약을 들고 화장실로 뛰었을 때, 걱정보다 약간의 희열을 느꼈던 사실에 스스로를 경멸했다. 안된다는 것은 알았지만 단 일주일 만이라도 학교를 안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친구를 그리고 본심을 잃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다음날 그 친구의 아폴로 미수사건은 전교생이 알게 되었고 모두가 그저 피식 웃고 마는 해프닝으로 끝나게 되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그는 정말로 아폴로 눈병이 걸렸지만 당장에 집으로 갈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 시절 우리는 왜 그렇게 학교를 탈출하고 싶었을까? 꼭 아파야만 쉴 수 있었던, 꾀병조차 허용되지 않던 그 시절의 빡빡함에 질려버렸던 것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