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소풍

by 눈 비 그리고 바람

전북 익산에서 대구로 가는 88고속도로 위.

모두 라디오 앞에 모여 있다. 정확하게는 주차장이 되어 버린 고속도로에 차를 세워둔 채, 도로옆 풀밭 돗자리 위라고 해야겠지. 어디서부터 무슨 이유로 막히는지, 또 언제 움직일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라디오를 들으며 언제 이 시국이 끝날 것인지만을 기다릴 뿐이다. 옆자리도, 그 옆옆자리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모두 돗자리 위에서 ‘에라 모르겠다’ 같은 탄식만 쏟아냈다. 와중에 아이들은 신이 났다. 소풍 온 것처럼 감탄사를 남발하며 고속도로 옆 생태 탐방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 아빠는 뉴스를 유심히 살폈다. 교통상황을 보기 위해서다. 가끔 헬기 위에서 꽉 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도로를 보며 ‘서울에서 부산까지 9시간’이라는 어마무시한 숫자와 마주 했다. 크고 작은 아빠들은 하나같이 혀만 차며 애꿎은 사과만 와그작와그작 씹었다. 큰집에 머물러 사는 가장 큰아빠가 먼저 운을 뗐다.


“시방, 너거들은 언제 출발한다냐?”

“저희도 조금만 있다 가봐야것구만요, 작년에 서울꺼정 가는데 일곱 시간이나 걸렸어라”


서울에 사는 덜 큰아빠가 기다렸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하따” 하며 큰아버지는 입을 벌리고 있었다. 사과를 먹기 위함인지, 대단함을 칭송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가장 막내인 우리 아빠도 대구까지 가는데 5시간 걸린다고 이야기했으면 좋으련만. 그저 사과를 포크로 쿡 찌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매번 우리는 이른 저녁을 먹고 나섰다. 집에 도착하면 밤 10시 정도에 도착하기 일쑤였다. 차에서의 5시간은 마치 인생 1주일치 굴곡과 맞먹을 정도였다. 이번에는 조금이라도 빨리 가면 안 되는 걸까 하는 표정으로 아빠의 옆모습에다 간절함을 그려봤다.


큰집을 탈출하는 순서는 연장자 순으로 진행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되는 규칙 같은 것이 있는 듯했다. 큰아빠가 가야 막내인 우리 아빠도 집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열린다는 말이기도 했다. 다행히 이번 추석에는 서울 큰아빠의 의지가 확고했다. 나는 반 친구들에게 세뱃돈 자랑할 생각에 벌써부터 웃음이 베실베실 삐져나왔다. 오며 가며 부침개를 더 이상 손으로 집어먹을 수 없다는 사실이 조금 아쉬웠지만. 대의를 위해서는 희생도 필요한 법. 짭짤한 부침개의 맛을 상상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무엇보다 ‘너 이제 몇 학년이니?’ 같은 질문을 명절 내내 물으시는 어르신들과, 마치 처음 대답하듯 새침하게 대답해야 했던 의젓함도 이제 거의 고갈된 상태. 명절 큰집 체험이 드디어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지점에서 ‘열심히 일한 자 떠나라’ 같은 흥분을 느끼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우리는 부침개를 넣고 끓인 잡탕 찌개로 점심을 뚝딱 해치웠다. 서울 큰아빠는 했던 말은 지킨다는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양말을 신고 있었다. 상을 치우는 사이, 현관 앞은 짐으로 가득했다. 벌써 짐을 다 싸둔 것 같았다. “어머~ 어머님 이런 거 안 주셔도 되는데” 하며 알록달록한 보자기로 포장된 음식들을 현관 앞에 쌓고 계시는 큰어머니 모습이 들어왔다. SBS 만화만 자랑하던 사촌 형들과도 드디어 인사를 했다. “다음에 놀러 갈게요 형 꼭 SBS 보여주세요” 하며 마음에도 없는 빈말을 끄집어내 손에 쥐어 주었다. 구수한 서울말로 돌아오는 대답을 살뜰히 챙겨두었다. 빳빳한 서울식 지폐도 큰아빠로부터 받았다. 드디어 우리가 갈 차례, 엄마는 벌써 아빠옆에 바짝 붙어 복화술로 닦달하고 있었다. ‘이왕이면 안 보이게 하지’라며 투덜거리면서도 대신 망을 봐주었다.


잠시 후, 아빠도 입을 열었다. “저희도 인제 가야” 잠시간 정적이 흐르자 잠자코 있던 엄마는 “우리 더 있다 가도 되는데” 라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줄줄 읊었다. 결국 아빠만 나쁜 사람이 되는 구조였다. 나는 엄마를 위아래로 훑고 있는 아빠를 보며 꺽꺽거리며 웃었다. 우리도 서둘러 짐을 챙겼다. 이런 거 안 주셔도 된다면서 악착같이 챙기는 엄마를 보며 큰엄마를 떠올렸다. 나는 이 방 저 방을 옮겨 다니며 인사를 드렸다. 10살이나 많은 큰집네 사촌형에게는 나이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방 귀퉁이에 세워둔 BB탄 총을 압수했다.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가족 모두 차에 올랐다. 그렇게 이틀간 정이 들었던 시골집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차는 빠르게 고속도로를 내달렸다. 12시가 되기도 전에 출발은 처음이라는 아빠의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창문을 조금 열어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콧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곡창의 고장에서의 바람은 따스하게 불어왔다. 여기는 악명의 88 고속도로. 고속도로라 하기에 너무나 초라하다. 왕복 2차선에 화물트럭의 거북이 주행 덕분에 모두 하향 평준화가 될 수밖에 없었던 씁쓸한 기억이 떠올랐다. 딱딱한 엑셀(옛 승용차 이름) 뒷자리 승차감은 시간의 강을 멈추다 못해 거꾸로 되돌리기 충분했다. 잠시 후 아빠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예측이 잘 들어맞아서 인듯했다. 평소 같았으면 상습 정차로 한참을 기다려 통과하는 곳이었으나, 오늘은 막히지 않고 잘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간혹 반대 차선에서 토끼처럼 달리는 차가 있으면 쌍라이트를 날려주기도 했다. 과속 단속 경찰이 매복해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여유까지 부릴 수 있었다.


그렇게 2시간을 달렸을까. 중간 정도 왔을 때쯤, 저기 앞 우리 차선에도 긴 피난 행렬이 이어져 있었다. 드디어 정차 시작인가? 아빠는 새로운 귀가 타이밍을 찾았다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던 터라 쉽게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우리는 결국 긴 행렬에 동참하게 되었다. 끝도 없이 들어차는 차들에 비해 꼼짝도 하지 않는 앞차들이 얄미워질 때쯤. 어디선가 메아리치며 긴 경적음이 들려왔다. 서로의 답답함을 대신하는 듯했다. 도로에서 시간을 버린 지 30분, 아빠는 이미 시동을 끈 채였다. 1시간이 더 지나자 아이들이 차 주위로 요리조리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간 갇혀있던 동심이, 호기심이, 정차의 압력의 버티지 못해 차문 밖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아빠 나도 나가면 안 돼요?"

아빠는 라디오 볼륨을 높이며 검지를 입술에 포개었다. “다음은 88고속도로 소식입니다. 대구 방향,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지리산 나들목에서 함양 분기점까지 10km 구간, 중앙선을 넘어 돌진하던 트럭과 승용차 추돌사고로 차량들은 모두 정차해 있습니다. 이 정체는 거창 나들목 지나 가조 터널 입구까지 길게 늘어져 있습니다. 영남권 진입하는 길목이 많이 혼잡하니 이용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하, 아빠의 짙은 한숨이 저기 하늘 위 떠다니는 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우리가 어디쯤인지 묻고 싶었지만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같은 라디오를 들었던지 차 여기저기서 탄식이 쏟아졌다. 이제는 하나 둘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답답한 차 안보다는 뻥 뚫린 자유를 선택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밖에서 기지개를 켜는 사람들과 아빠를 번갈아 봤다. 오늘따라 더 슬픈 아빠의 미간이 보였음에도 탈출을 감행하고 싶다는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잠자코 보던 엄마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저 바라, 앞차는 시동 끄고 돗자리 꺼낸다”

“우리도 돗자리 꺼내가 나가자. 아니다, 이왕 꺼내는 거 부침개도 꺼내자”


엄마는 작정한 듯 은박 돗자리를 깔고 붉은색에 검정 테두리가 있는 보자기를 풀고 있었다. 누가 보면 이상한 듯 보이겠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지극히 정상처럼 보였다. 나도 한껏 들떠 무릎을 꿇고 들썩거리며 손으로 부침개를 집어먹었다. 아빠도 우리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점차 깊게 파인 미간에 고랑이 옅어지고 있었다. 나는 엄마 무릎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미 출발한 지 5시간이 지나고 있었지만 기분은 전혀 처지지 않았다. 오히려 온 가족 소풍 온 것 같아 좋다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온 가족 소풍 온 것 같아 좋다는 말이, 하늘을 한 바퀴 돌아 그대로 우리 위로 내려앉았다.



근래 노로바이러스 때문에 죽다 살았습니다. 매일 죽만 먹다 보니 징글징글하다 생각하던 현생도 다르게 보이더군요. 저번주부터는 6개월간에 육아휴직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글에 전념하면서 하고 싶은 거 다하면서 지내볼까 합니다. 항상 건강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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