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커피, 캬라멜 마키아또, 아메리카노.
미취학 시기 놀이터 앞에 놓여있던 커피 자판기에는 다양한 커피를 팔았다.
놀이터 모래바닥은 한참 놀다 보면 100원, 200원 동전을 발견할 수 있기도 했는데, 어느 날엔가 놀이터 바닥에서 찾은 동전으로 뽑아 마셨던 블랙커피의 맛은 너무나도 쓰고, 충격적이었다.
마침 하도 허약해서 보약으로 녹용이 들어간 한약을 먹고 있었는데, 차라리 그게 더 낫다고 느껴질 정도로 쓰고, 맛이 없었다. 당연히 한 모금도 채 못 마시고 나머지는 버려졌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집에 선물로 들어온 맥심 모카골드, (지금은 ‘알커피’ 라고 불리더라, 귀여워라) 선물 세트를 프림에 설탕 가득 섞어 마셔보고 나서는 커피가 꽤 맛있는 음식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린이들한테는 커피를 먹이면 안 된다고 해서 그때 딱 한번 마셔보고, 가끔 부모님 눈을 피해 사 먹었던 빙그레 아이스크림 ‘더위사냥’을 통해, 서울우유 커피맛 삼각 봉지를 통해 대충 커피는 이런 거구나… 하는 유년기를 보냈다.
본격적인 커피를 판다는 커피집이 한국에 처음 자리한 것은 99년 이대 앞 스타벅스 1호점이 들어서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청소년 시기, 카페라는 공간이 지역의 상업지구에도 우후죽순 들어서기 시작했다. 하루 자고 일어나면 생기는 커피집들을 보면서 대체 무슨 매력이 있기에 비슷비슷해 보이는 공간이기에 저렇게 많이 생겨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전 ‘시내’라고 불리던 상업공간에는 ‘카페’ 보다 쌍화탕이나 계란 노른자 담가주는 ‘모닝커피’ 같은 거, 그런 걸 주로 팔면서 시골 동네에 커피 배달해주는 아가씨들 고용해다 동네 중늙은이 아저씨들 시중 들어주는… 그런 느낌의 가게들이 많았는데
시내에 새로 들어오는 커피집들은 그런 가게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가씨 배달하는 커피집이 사라졌다는 건 아니다)
당시 스타벅스는 ‘별다방’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한창 대학생들이나 사회초년생들에게 인기의 장소로 급부상하고 있었고… 커피빈은 ‘콩다방’ 이란 이름으로 스타벅스와 한쌍으로 젊은이들이 한 번쯤 방문해 보고 싶은 공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내가 살던 지역에 스타벅스가 들어온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고… 스타벅스 입네, 별다방 입네, 하는 공간에 대한 욕구로 비슷해 보이는 작은 가게들이 여기저기 생겨나더라.
좋아하는 장소는 절대 아니었다. 지역에 자리한 ‘커피집’ 이란 공간은 아저씨들이 여자 끼고 희롱하는 공간이란 이미지가 강했고, 상술한 별다방, 혹은 콩다방을 이미지하고 찾아갔던 지역의 ‘카페는 술을 파는 건지 커피를 파는 건지 헷갈리는 공간 구성을 하고 있었기에, ‘애들은 가라’ 느낌이 불편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메리카노. 그때 처음 그런 이름의 커피를 들어봤던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르던 스물한 살, 사립대학교 다녔던 나는,
학교 안에 ‘카페’라고 불리는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지방에 있는 대학교였고, 찾아간다고 해도 지역의 카페 방문에서처럼 실망할까 봐 근처도 가까이 가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 그때 만나던 학교 친구와 데이트 비슷한 거 한다고 소문의 학교 카페에 가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한 시간 시급에 음료 한잔을 마실수 있었다. 대학교 안에서 판매하는데도 이렇게 비싸다니!
굉장히 긴장이 됐었다. 그날 입었던 건 회색 티셔츠였고, 도대체 ‘대학생’이라고 보이지 않을 만큼 아직 중고생 티를 못 벗은... 그런 차림이었다.
혹시나 이런 차림으로 커피집에 들어간 어린 나를 누군가 눈짓으로 비웃고 있지는 않을지, 걱정스럽고 조마조마했던 순간.
마침 인기리에 팔리던 ‘캬라멜 마키아또’라는 커피를 시켜봤고, 참 맛있더라. 커피라는 게 이렇게 맛있을 수도 있구나, 하고 내심 감탄하고, 처음 마셔보는 거였는데도 언젠가 마셔본 적 있었던 것처럼,
혹시나 처음인 거 들키지 않을까? 하는 얼굴로 조심스레 빨대를 입에 대던 그 순간이 간간히 떠오르곤 한다.
그렇게 커피를 다 마시고 잔을 가져다주는데..
카페 운영하시던 아주머니가 그러셨다. ‘리필해줄까요?’
리필이라니, 와. 이 맛있는걸 또 한잔 주신다고?
서비스였을까, 그건 아니면 어린 학생들 모자랄 거 같아서 한잔이라도 더 주려고 하셨던 걸까.
‘똑같은 건 안되고 아메리카노 한잔 줄게요’
‘네? 아메리카노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주신다는데, 군말 없이 받았고,
두 번째 잔으로 마시게 되었던 것은 보리차랑 비슷한데 색깔은 약간 더 짙은...
미취학 시기에 마셨던 블랙커피랑 비슷한데 쓰기만 한건 아니라 조금 고소했던, 그런 맛이었다.
처음 마셨던 게 너무나 맛있어서.. 역시 공짜 리필은 어쩔 수 없지,
라고 생각하면서 자리에 앉아 잘 알지도 못하는.. 커피란 것의 역사에 대해, 친구랑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그러고 나서 잔을 갖다 주는데... 이번엔 주인아주머니가
‘커피 원두 남은 거 있는데 가져갈래요?’
‘? 그게 뭔가요?’
‘커피 내리고 남은 가룬데 냄새가 참 좋아요’
몰랐지... 정말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가루 형태로 뜨거운 물에 넣어 휘휘 저으면 끝나는 줄 알았던 동서 맥심 모카 골드 (현재 알 커피,라고 불리는 애들)이었는데..
찌꺼기가 나온다고? 그럼 내가 방금 먹은 아메리카노는 그 찌꺼기를 짠 거란 말인가? 왠지 가난한 학생 취급받은 게 서글프기도 했다만, 그날 처음 마셨던 캐러멜 마키아또는 정말 맛있었다. 최초의 기억이라 더 아름답게 채색되어 있는 거겠지.
이후에도 커피를 자주 마시지는 않았다. 한 시간 시급보다 비싼 커피를 쉬 사 먹을 수 있을 만큼 학생 시기 벌이가 좋지도 않았고, 그거 말고도 사야 될 것들이 많았다. 점심식비도 아슬아슬하고, 교재비에 교통비까지 빠듯한 시기에 카페의 커피 한잔은 사치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어릴 때 어른이 되면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될 거라고 은연중에 생각을 하게 되긴 했었다.
정말 그랬다. 직장생활을 하며 만나는 자료들은 어마어마했고, 학교에서 배운 것은 정말 새발의 피도 안됐다.
계속 배우고 익혀야 했다. 그 자료량을 견디고 집중을 유지하려면 각성제인 커피의 힘을 빌려야 했다.
하지만 커피는 그 자체로 너무나 쓰고…. 당연히 알 커피 한 숟갈에 설탕 세 숟가락씩 섞어 마시기 시작했다.
야자 경화유로 만들어진 프림은 먹고 나면 항상 속이 더부룩해서, 안 먹었다.
그렇게 알 커피에 설탕만 섞은 ‘설탕 커피’를 포션 삼아 직장생활을 유지해 나갔다.
이때 '믹스커피'가 직장인을 대상으로 대 유행시기를 맞이 했던 것 같다.
맥심에서 나온 스틱형 믹스커피가 편리해서 더 유행하던 시기.
하루는 사무실 언니가 그랬다. 커피에 설탕을 안 타게 되면 그때부터 어른이라고. 그게 커피의 맛을 알게 되는 거라고 했다. 자기도 이런 이야기를 자신의 언니에게서 들었노라고, 그런 소리 하는 언니를 보면서 그냥 사람의 차이겠지~ 했는데, 자신도 어느 순간 커피에 설탕 없이 마시게 되었다며 커피의 쓴맛을 알게 된 게 달갑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고 했다.
에이, 그냥 사람의 차이겠지. 단거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어~ 그리고 설탕 안 넣고 마실수 있으면 덜 번거롭고 편하겠구먼 왜 안 달갑다는 거지?
그런데 나도 연차가 올라가며 어느 순간 설탕의 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언니가 말했던 것처럼, 정말 커피 고유의 맛이 어떤 건지 서서히 알게 되더라. 그렇게 설탕 없이 알 커피만 뜨거운 물에 타서 마시다가 카페에서 파는 에스프레소+물을 섞은 ‘아메리카노’를 다시 마시게 되었다.
고소하고 맛있었다. 이제 더 이상은 알 커피로 못 돌아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탕 빠진 커피만 마셔도 어른이라고 했던 사무실 언니 생각이 났다. 근데 이젠 에스프레소에 물만 섞은 아메리카노가 맛있다고 느껴지다니.
어지간히 찌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는 어른이 된다는 건 커피맛을 알게 된다는 거다,라고 멋있게 말하면서 씁쓸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했었는데, 세월이 지나 카페에서 에스프레소에 물만 섞은 아메리카노를 맛있게 마실수 있는 사람이 되고 보니 그때 언니의 씁쓸한 미소가 어떤 뜻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도 빙그레 더위사냥에, 서울우유 커피맛은 또 자기가 가진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고, 그건 그거대로 맛있는 거니까. 설탕이랑 우유를 섞은 커피랑, 카페에서 파는 에스프레소, 아메리카노, 뭐 그런 것들은 아예 다른 카테고리니까. 맛있게 느낄 수 있는 것이 늘어난 거로 삶에 대한 경험치가 늘어났다는 기분이 들었던 것도 잠시.
이젠 세파에 많이 찌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더 이상 커피우유나, 더위사냥 같은 커피 가공품은 먹질 않는다. 선호도가 밀렸달까? 이젠 가하거나 첨가물을 섞은 커피 생각이 나질 않는다. 어릴 때 ‘캐러멜 마끼아또’를 처음 마셨을 때, 더위사냥이랑 커피우유를 더 이상 옛날처럼 행복한 마음으로 찾지 않겠구나… 하는 걸 깨닫는 순간은 약간 서글픈 느낌까지 들더라.
세월이 흐르며 사람도 변해가는 거겠지. 몇 년 뒤엔 또 다른 느낌으로 커피를 대하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