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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준희 Mar 24. 2021

한 뼘의 세계

제 세상을 누비는 가녀린 다리에게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내일이란 기대 아래 살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오늘을 견뎌내다 문득. 내가 사는 세상이 이리도 좁았는지에 대하여 무자비하게 골몰하다 못해 잠적을 반복하던 나를 다그치곤 한다. 한 뼘을 웃도는 나의 자리와 그 한 뼘의 반을 차지하는 시선의 자리. 한 뼘에 머무르는 것에 지쳐 모든 걸 내려놓고 싶은 순간들이 겹겹이 쌓이며 나를 옥죄어 올 때, 나는 주로 도망을 택했다.



     엄마가 가르치던 피아노가 싫어 10년간 좋아하는 둥 마는 둥 대강 바이올린을 켰던 과거, 무대에 서는 것이 두려워져 돌고 돌다 글을 좇는 지금. 별다른 준비도 없이 멋모르고 치렀던 예대 실기 시험, 운 좋게 학부에 들어가면서부터 나는 예고 없는 사랑에 빠지게 된 사람처럼 글을 앓았다. 누군가 정해준 길에서 벗어나게 된 후 우연히 만나 꿈꾸는 것조차 버거울 만큼 사랑했다. 그렇게 너무 사랑해 곁에 두는 것이 어렵게만 느껴져 피하고만 싶었던 그것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산책을 대하는 반려견 라떼의 좁지만 따뜻한 세계를 돌아본다.



     살아있음으로 스라릴 때, 지친 마음으로 세계를 접은 채 내 방 서랍에 내 존재를 구겨 넣어둘 때마다 나는 라떼가 단지 맨 윗동 평지를 제 세상처럼 누빌 때를 떠올린다. 어쩌면 그렇게 짧디 짧은 가녀린 네 다리로, 매일 밥 먹듯 오고 가는 그 좁은 평지를 자기가 알고 있는 세상의 전부인 양 매번 최선을 다해 뛰며 매 순간 최선을 다해 행복해할까.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더 넓은 세계를 안겨주지 못한 주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그 모습이 애달파 슬프다. 나는 두 번의 삶을 준다 해도 모를 것 같은 이 생의 소중함을 진즉에 깨우친 듯, 봄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라떼에게 순간의 행복과 숨 쉬는 기쁨을 배운다. 그 앞에서 나는 차마 변명하지 못한다. 열병 같은 이 마음이 두려워 내내 피하고 도망친다는 비겁하고 누추한 나의 변명은 라떼의 해맑은 미소와 최선의 헐떡거림 앞에 맥없이 잠적한다. 좋아한다는 말조차 꺼내기 무섭게 맹렬히 달려가는 라떼의 순수는 그 어떤 것보다 나를 일깨운다.


     라떼는 어릴 적부터 가장 좋아하는 산책이라는 단어만 들으면 산으로, 바다로 제 체력의 한계를 인지할 새도 없이 아빠 류의 뒤라는 목표 하나를 두고 맹렬히 그를 쫓았다. 그 모습을 회상할 때면 나의 아빠 류가 유년 시절 나에게 했던 말들이 생각난다. 아빠와 큰 아빠는 주말마다 서울 산들을 등반하곤 했는데, 어느 날은 갑자기 어린 나와 친척 언니까지 말도 없이 그 험한 곳에 데려간 것이다. 처음에는 거대하고 가파른 그곳이 무서워 그만 돌아서고 싶었다. 그러나 바쁜 아빠와 함께하는 시간은 늘 부족했고 그만큼 희소했기에 이 손을 놓지 않는다면 어디든 끝까지 따라갈 수 있다는 믿음으로 조심스레 발을 떼었다. 그렇게 목적지도 모르는 채 이끌려간 나는 묵묵히 운동화 끈만 단단히 묶어준 아빠의 뒤만 한 시간 넘게 졸졸 따라 올라갔다. 중반쯤 올랐을까. 사촌 언니는 지쳤는지 슬슬 큰 아빠에게 업어달라는 신호를 보냈고 결국 언니는 큰 아빠의 등 위에서 산꼭대기의 정경을 마주했다. 의외로 나는 정상에 오를 때까지 아빠 손을 놓지 않았고 아빠 류는 등반 이후 줄곧 그 일화가 내 자랑거리인 양 언제나 누군가에게 말하곤 했다.



       우리  딸은 말야,  깡다구라는  있어 가지고.

       나중에 뭐든  거야 아마.

        사촌들은 업혀서 올라가는  얘는 글쎄.

       (막걸리 잔을 내려놓으며 촤하~ 하는 느낌으로)

       암말 없이 끝까지 나를 따라 오르더라니까.

        (촤암나.)



     나에게도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아빠 류의 말처럼 내가 피하지 않고 끝내는 뭔가를 해낼 수 있을까. 내 자리가 한 뼘보다 더 좁아질 때마다 류의 그 말이 예언이었으면 좋겠는 마음으로 라떼닮기를 주저하지 않기로 한다.


    그리고 내 안에 그놈의 깡다구라는 것이 여전히 존재하는지는 모르겠다만 이따금 류와 뽀송이 눈물을 훔쳤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알 것 같다. 제 세상의 전부인 양 매일 같은 곳을 누비며 달리는 저 조그만 아이의 왜소한 다리를 지켜보기만 하기에는 영 아파서. 앞으로 더 멋진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 거란 최선의 변명으로 앞선 미래를 불투명하게나마 보장해줄 수밖에 없어서. 라떼를 지켜보는 내 눈과 마음이 어쩌면 그들과 닮아있지 않을까.


     

     둘째는 지금 어디쯤을 행군하고 있을까. 나는 차라리 지켜보지 않는 편이 낫겠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서랍 속에 접어두었던 나를 깨워 편지를 해야겠다. 세상을 넓혀줄 수도, 대신 달려줄 수도 없지만 내가 그 곁에서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당장 욕심내기에는, 앞으로 좋아할 날이 더 멀기에. 당장에 좁은 세상일지라도 옆에서 함께 속도를 맞추며 그렇게 한 발 한 발 걸어가 주기로 한다. 더불어 무언가를 미친 듯이 좋아하는 마음만큼은, 열병을 앓더라도 다시는 숨기지 않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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