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계에서도 ‘프로슈머(Prosumer)’ 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의 『제3물결』에서 등장하는 이 말은 생산자(Producer)와 소비자(Consumer)의 합성어로, 비전문가이지만 생산활동에 관여하는 집단을 의미한다.
본래 프로슈머는 제품을 다루는 산업 분야에서 주로 사용되었지만, 최근에는 문화예술계 내에서도 곧잘 쓰이는 모양새다. ‘문화민주화’로 정책기조가 잡힘에 따라 전문예술인과 비전문예술인 간의 경계가 느슨해지면서 생겨난 현상으로 풀이된다.
비전문예술인은 예술활동을 생산함과 동시에 소비하는 중요한 존재로 떠오르고 있다. 침체되어 있던 문화예술계를 부흥시킬 다크호스로 평가받는 것이다.
재능과 경험이 중시되는 문화예술계 내에서 전문예술인과 비전문예술인 간의 벽이 허물어졌다는 것은 일단 긍정적으로 보인다. 문화예술을 향유하는 시민의 입장에서도 프로냐 아마추어냐의 여부와 관계없이 더욱 수준 높은 작품을 즐길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실력’의 가치가 더욱 중요해진 지금, 기성 전문 예술인과 신진 비전문예술인이 서로 공생하기 위해서는 과연 무엇이 필요할지 고민해봐야 한다.
누가 진짜 예술인인가?
얼마 전만 해도 ‘예술인’은 기본적으로 대학 등지에서 정규교육 과정을 마친 예술 전공자에게 주어지는 호칭이었다. 사회의 여느 분야처럼 어느 학교를 나왔고, 누구에게 배웠는지가 가진 실력보다 우선되는 일이 많았다. 예술 전공자와 비전공자의 구분이 확연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예술활동의 경로가 다양화되면서 기존 노선을 거치지 않고도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됐다.
미술의 경우에는 전문 화랑을 통하지 않더라도 공공에서 지원하는 전시·아트페어에서 작품을 선보일 수 있으며, 음악의 경우에는 유서 깊은 콩쿠르에서 수상하지 못했더라도 대중매체의 오디션이나 유튜브 채널 등으로 이름을 알릴 수 있게 되었다.
만약 자신에게 예술교육이 필요하다면 꼭 대학에 가지 않더라도, 지역 문화센터 등지에 개설된 질 좋은 강좌를 수강하며 스스로의 예술적 잠재력을 시험해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예술인 복지재단에서 발급하는 ‘예술활동증명’의 일정 요건을 충족하면, 누구나 정부에서 인정하는 공공연한 예술인이 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예술인’의 범위가 대폭 확대되면서, 기성 예술인과 신진 예술인 간의 보이지 않는 갈등이 생겨나고 있다. 기성 예술인의 입장에서는 ‘예술활동증명’을 마치 자격증 취득처럼 생각하는 일부 신진 예술인들이 보기 불편한 것이고, 신진 예술인의 입장에서도 ‘그들만의 리그’를 공고히 하려는 일부 기성 예술인들이 못마땅한 것이다.
하지만 서두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번 글에서는 풍족하지 않은 지역 문화 예술계 안에 서 ‘어떻게 하면 서로가 상생하며 잘 살아갈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멘토와 멘티로 맺어지는 관계
기성 예술인은 신진 예술인들에게 좋은 스승이자 좋은 롤모델이 될 수 있다. 기성이냐 신진이냐와 무관하게 예술인이라면 누구나 ‘좋은 예술’에 대한 갈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막 ‘예술활동증명’을 받아 공공에서 인정하는 예술인이 되었다고 한들 예술가로서 완성된 것은 절대 아니다.
예술은 그 끝이 없는 만큼, 평생 동안 학습하고 작업하고 연구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진 예술인만큼 예술교육에 대한 수요가 큰 계층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예술에 나름 관심이 있다고 말하는 평범한 일반인과는 가히 비교 불가한 것이다.
따라서 기성 예술인은 지금까지 해왔던 일반인 대상의 예술교육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진 예술인을 위한 프로그램을 계발한다면 경제적 측면에서 큰 보탬이 될 것이다. 아울러, 신진 예술인과의 멘토-멘티 관계는 기성 예술인에게도 큰 동기부여가 되리라 본다.
좋은 예술가의 손길에서 탄생한 작품은 그 자체로서 가치를 증명하기 때문이다. 기성 예술인의 실력과 경험에 감화된 신진 예술인은 그의 든든한 지원군이자 팬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지역 문화예술계
그동안 문화예술 정책의 방향성과 그 수혜대상을 놓고 지역 내 예술인들과 예술단체들 간의 논란이 많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정책 기조가 정해진 지금은 더 이상 순수예술이냐 생활예술이냐의 대립이 무의미하다고 본다.
개인적으로는 순수예술과 생활예술이 왜 대척점에 있는지부터 의문스럽다. 지금껏 예술활동에 투자한 시간과 노력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일각의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전문예술인 중에서도 진정으로 순수예술인이라 불릴 수 있는 이는 드물다는 점을 감안하면 말이다.
정권에 따라 정책의 방향성은 어떻게든 바뀌기 마련이고 그 수혜대상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물론 예술에 있어서도 예산의 중요성은 대단하지만, 예산만이 예술의 전부인 것처럼 여기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역 예술인과 예술단체들이 꾸준히 좋은 작품을 생산하고 선보이다 보면, 어느 순간 대중들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그리고 대중의 시선을 의식하는 정권에서도 더 많은 지원을 할 수밖에 없다. 좋은 작품이야말로 예술가의 권리를 보장하는 가장 큰 무기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느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무작정 비판하며 다음을 기약하기보다, 상황에 따라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순수예술인과 생활예술인은 애초에 적대관계가 아니다. ‘문화예술계’라는 조그마한 울타리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인 셈이다.
어느 날 이웃에게 밥 한 공기가 더 주어졌다면 언젠간 나에게도 더 주어질 날이 오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좁은 울타리 안에서 당장의 밥 한 공기를 놓고 다투기보다, 어떻게 하면 서로 합심해서 울타리를 더 넓힐 수 있을지를 고민했으면 한다.
이 좁은 울타리 안에만 갇혀 있기에는 세상은 넓고, 우리의 잠재력은 그렇게 약소하지 않은 것이다.
※ 위 포스트는 오피니언타임스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