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무엇을...?
약 3년 간 다닌 잡지사의 일을 관두고, 최근 두 달 새 두 번의 이직을 했다.
이제 만 나이로도 서른이 넘은 터라, 어디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정해야 했다.
철없던 이십 대 중반에는, 부푼 꿈을 안고 가슴속 뜨거움만으로 소설가가 되겠다고 틀어박혀 있었다.
변화의 이십 대 후반에는, 비어 가는 잔고를 보며 글을 쓸 수 있는 직업이라면 타협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삼십 대 초반인 지금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돈도 참 중요하구나, 하는 생각도 갖게 됐다.
어차피 반복되고 고달픈 직장 일이라면 급여라도 높여가야 수지에 맞는 것이다.
그렇게 두 달 전, 3년 만의 구직 활동으로 얻은 일은 지역 신문사의 에디터 일이었다. 흔히 아는 조판을 하는 편집일은 아니고, 신문 외적인 온라인 콘텐츠를 제작하고 약간의 기사를 쓰는 일이었다. 나는 이번에도 직업을 구하면서 '글을 쓰는 일'이라는 카테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나름은 규모가 있는 회사에서 갖추어진 업무체계를 익히고, 조판 관련 프로그램들을 사용해보면서 매일의 지면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눈여겨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네이버와 다음 포털로 내 글을 내보낼 수 있고, 내 이름을 검색하면 기자 명함이 상단에 노출된다는 점은 좋았다.
하지만, 급여가 박한 편이었던 터라 다들 이직을 위해 버티고 있는 분위기였다. 어느 회사에서든 중추라고 할 수 있는 5~15년 차 사이의 직원이 거의 없었다. 아무리 급여가 적다 해도 나로서는 전 직장의 급여가 높지 않았던 터라 옆그레이드 정도는 되는구나, 하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여기서 경력을 쌓은 사람들은 다들 어디로 가는지 물어보았다. 잘 풀리면 페이를 높여 중앙지로 가고, 그렇지 않으면 직무를 포기하고 기업의 홍보팀으로 많이 빠진다고들 했다. 그렇다면 내가 여기에 더 있을 이유는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 옮기는 김에 한번 더 옮겨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구직 사이트에 로그인을 했다.
마땅히 눈에 들어오는 공고가 없었지만, 직무 범위를 홍보와 마케팅으로 넓히고 나니 선택지가 조금 더 열렸다. 어디에선가 이직을 할 때는 적어도 전 급여의 20%는 높여서 가야 한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20%까지는 아니었지만 비슷한 수준의 급여를 주겠다고 써놓은 회사가 있었다.
업력이 4년밖에 안 됐음에도, 매년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며 400억 원대 매출을 기록하고 있는 전문서비스 기업이었다. 직무는 마케팅 콘텐츠 에디터였다. 이전의 경력을 인정을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지원을 했다. 그리고 채용이 돼 지금까지 약 한 달간 다니고 있다.
이 일의 재밌는 점은, 살아 있는 독자를 위해 글을 쓴다기보다 포털의 검색엔진을 위해 글을 쓰는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워낙 마케팅을 중요시하고 공격적인 비용을 들이는 업종인 탓에, 소위 말하는 SEO(Search Engine Optimization, 검색엔진 최적화)가 무엇보다 중요하긴 했다.
채용공고에 나와 있던 목적에 부합하는, 논리적인, 스토리텔링이 있는 글쓰기의 독자는 다름 아닌 검색엔진이었던 것이다. 블로그 마케팅만큼 노골적이진 않았지만, 통계에 기반한 노출이 잘 되는 키워드들은 정해져 있었고, 그 키워드들을 최대한 활용하되 읽을 만한 가치 있는 글을 써내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지난 몇 년간 정말 다양하고 까탈스러운 독자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글을 써왔다. 소설, 칼럼, 기사, 인터뷰, 리뷰, 비평 등 글의 형식과는 무관하게, 예상 독자층이 선호할 만한 용어와 흐름에 맞추어 왔다. 그리고 대개 좋은 인상을 받았다는 평을 많이 들어왔다.
하지만 검색엔진을 위한 글쓰기라니, 무언가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다. 옛날 같았으면 무턱대고 나와 맞지 않는 일이라며 다른 일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지금도 내일의 출근을 걱정하고 있다는 건, 그나마 마음에 들었던 페이의 힘이랄까.
어찌 됐든, 생각해보면 좋은 점도 있었다. 검색엔진은 호불호가 분명했다. 심지어 자기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명확하게 알려줬다. 이 단어는 좋고, 이 단어는 싫어. 글의 제목과 소제목에는 주제가 반복되더라도 꼭 들어갔으면 해. 그것만 맞춰주면 너의 글을 좋은 자리에 놓아줄게.
음, 어느 살아 있는 독자가 이렇게 세심하게 피드백을 해준단 말인가. 지금껏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유 없이 마음에 든다고 좋다고 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분통을 터뜨리거나 둘 중 하나였다.
뭐, 그것보단 낫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여전히 이 딱딱한 로봇 대가리를 위해 글을 쓴다는 게, 낯설고 썩 내키지 않는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맞추어 가곤 있지만.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렇게 탄생한 내 글들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데 있다. 매 문단 반복되는 일정량의 키워드와 문장들은 나를 무척 괴롭게 했다. 왜 블로그의 광고 글들이 저 모양 저 꼴이 되었는지 조금씩 알아가는 요즈음이다. 어차피 사람들은 글을 제대로 읽지 않으니, 로봇 대가리의 마음이나 사서 좋은 자리에 글을 올려놓는 게 현실적이긴 하지만.
이래서야, 언젠간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글을 쓰겠다는 꿈이 흐지부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다간 정말 로봇들을 위한 글 밖에 쓸 줄 모르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든다. 그만큼 검색엔진의 로직은 강력하고, 수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다.
그래도 공장의 부품처럼 하루를 살아가는 모던타임스의 찰리 채플린을 떠올리며, 이건 글이 아니야, 그냥 단순 반복 작업일 뿐이야,라고 애써 믿으려 하고 있긴 하지만 그다지 개운하진 않다.
그래서 더욱 틈틈이 시간을 내서 나의 글쓰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로봇 세상에서 로봇을 위해 살아가지 않으려면 말이다. 물론, 완벽한 로봇의 세상이 도래한다면, 우리가 더 이상 인간을 위해 글을 쓸 필요는 없어지겠지만.
망각과 한계를 모르는 로봇들은 점점 똑똑해져 가고, 우리는 조금씩 로봇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어차피 ‘로봇은 인간을 위해 일해’, ‘로봇을 통제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야’,라는 찻잔 속 외침만으로는 대세를 거스르기 힘들다. 그 인간의 정체성을, 일정 부분 로봇이 결정하게 될 테니 말이다.
그리고, 언젠간 우리는 우리의 주체성을 더 이상 지키기 힘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로 살아갈 수 있는 날이 과연 얼마나 남았을까. 우리의 것을 지키고, 반드시 갖추어야 할 시점이, 의외로 서둘러 다가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 위 포스트는 논객닷컴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