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에 누워서도 언제든 부르기만 하면 시간과 날씨 알려주는 애플의 '시리'나 우리의 취향을 늘 앞서 제안하는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그다지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다. 아무리 똑똑해졌다고 한들 이들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편의를 봐주는 기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초에 등장한, 1조 개 이상의 데이터를 학습하고 최첨단 AI로 무장한 '챗GPT'는 우리에게 충분한 위협이 되고 있다. 인간의 고유 영역이라고 여겼던 '가치판단' 행위를 모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마치 '우리 기계보다 너희 인간이 나은 게 대체 뭔데?'라고 따져 묻는 듯하다.
챗GPT의 강점은 기존 AI와 달리 정보를 단순 취합하는 것을 넘어 일정한 ‘가치판단’을 통해 새로운 정보를 조합해 내는 데 있다.
여기서 ‘가치판단’이라는 용어를 무리하게 사용하는 까닭은, 챗GPT의 판단주체인 알고리즘이 수많은 인간의 의사결정 과정을 학습한 다음 최적의 결과물을 도출하는 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챗GPT의 학습과정은 타인의 의사결정 행위를 직간접적으로 모방하며 성장하는 인간과 닮아있다.
만약 기존 AI와 챗GPT에게 각각 ‘인류의 미래’에 대해 묻는다면, 전자는 인류의 미래에 관한 정보를 백과사전·논문·기사·웹사이트 등에서 찾아 제시하겠지만, 후자는 그 정보들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취사선택하여 하나의 맥락으로 구축하여 보여준다.
인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데이터를 참조한 응축된 결과물을 말이다.
혹자는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의사결정과 기계의 정보조합을 어떻게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있냐?'라고. 맞는 말이다. 아직까지 기계의 정보조합은 인간이 보기에 빈틈이 뻔히 보일 만큼 조악하다. 자신이 모르는 질문에 대해서는 7살 아이처럼 허황된 거짓말로 답을 대신하기도 한다.
하지만 기계가 기존 정보를 조합하여 전에 없던 새로운 정보를 만들어내기 시작한 이상, 일정 수준 이상의 정교함을 갖추는 것은 시간문제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인간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지금처럼 학습력과 기억력을 우선시하는 교육을 고집하며, 두 분야에서만큼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기계의 구두닦이 노릇이나 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불행히도 요즘의 기계들은 구두를 신지도 않고, 기름칠을 필요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이라는 종이 가진 최대 강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여느 생명체보다, 그리고 기계보다 독보적으로 우월한 강점을 하나 갖고 있다. 바로 뇌가소성을 토대로 한 ‘적응력’이다.
우리의 뇌세포는 주변 환경에 따라 성장과 쇠퇴를 반복하며 유동적으로 변화해 왔다. 우리가 원시사회에서도 정보사회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 육체를 가지고 무리 없이 살아가고 있는 이유다.
우리는 ‘계산기’가 처음 발명되었을 때를 떠올려보아야 한다. 계산기가 발명되기 이전에는 셈을 빨리하는 사람이 수학과 공학을 연구하는 데 훨씬 유리했을 것이다. 어쩌면 셈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은 수학자나 공학자가 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계산기가 대중화된 이후에는 셈을 잘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를 비난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셈의 영역은 기계에게 일임해 버렸기 때문이다. 오히려 셈에서 자유로워진 인간은 수학과 공학의 논리적·응용적 측면을 더욱 계발하여 눈부신 기술발전을 이룩했다.
챗GPT를 앞세운 인공지능의 등장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지금껏 추종해 왔던 가치들에서 벗어나, 또 한 번 무엇을 학습할지, 무엇을 계발할지를 놓고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앞으로도 기계는 인간을 대체하기 위해 끊임없이 쫓아올 것이고, 우리는 그때마다 새로운 영역을 창조하 도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숙명이라는 게 있다면 아마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카메라가 발명되었다고 해서 회화가 사라진 역사는 우리에게 없었다. 오히려 우리의 예술은 더욱 찬란하고 다채롭게 빛나고 있다.
※ 위 포스트는 논객닷컴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