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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션 SEAN Jun 21. 2023

[칼럼] 생각한다는 것과 느낀다는 것

내게는 늘 ‘식사 시간이 3시간쯤 돼야 한다’고 말하며, 프랑스인의 삶을 동경하는 친구가 있다. 나는 프랑스인들도 요즘은 바쁘다며 우리와 다를 게 없다고 답하지만, 그 친구에게 각인된 이미지는 꽤나 강력한 것이어서 매 끼니마다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왔다. 


그러던 어느 한적한 평일 오전, 나와 앞으로도 수많은 끼니를 때워야 할 친구를 위해 이제 막 문을 연 브런치 가게를 방문했다. 정말 점심식사를 3시간 동안 해보기로 작정한 것이다.


오븐에 구운 소시지와 계란 프라이, 버터 바른 빵, 한 무더기의 샐러드가 큰 접시에 담겨 나오는 플래터는 한눈에도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우리는 맵싸한 봉골레 파스타와, 대화하며 먹기 좋기 한입피자까지 주문해서 아주 푸짐한 상을 차렸다. 


이렇게 음식을 늘어놓고 먹는 건 프랑스 식에 어긋나지만, 그 정도는 친구도 눈 감아 줄 모양이었다. 덕분에 아주 즐겁고 풍성한 3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흥미로웠던 점은 같은 음식을 두고 식사를 했지만 우리의 '먹는 방법'이 확연히 달랐다는 것이다. 직장생활을 꾸준히 해온 나는 눈앞의 접시부터 효율적으로 공략해 갔다. 하지만 친구는 이 접시 저 접시에 있는 음식들을 조금씩 앞접시로 덜어와서 이리저리 조합을 해서 먹어보는 것이었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조합을 찾으면 내 접시에도 친히 권해주었다. 과연 이렇게 밥을 먹으려면 3시간은 거뜬히 필요할 듯싶었다.


나와 친구의 가장 큰 차이는 '생각을 하며 먹느냐, 그렇지 않으냐'였다. 음식마다 맛을 생각하며 어울리는 조합을 고민해 보는 친구와, 단순히 '맛있다, 맛없다'로 판가름하는 나 사이에는 거의 인간과 들짐승 정도의 격차가 있었다. 


평소에 스스로를 '사람'이라고 굳게 믿었던 터라 내가 받은 충격은 상당히 컸다. 나는 늘 바쁘다는 핑계로 생각하기를 거부해왔지만, 어느새 시간과 여유가 충분하더라도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감정을 캐릭터화 한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

우리는 스스로 생각을 많이 하며 살아간다고 믿는다. 하지만 곰곰이 돌아보면, 의외로 많은 판단이나 결정들이 감정 혹은 느낌에 따라 내려진다는 걸 알 수 있다. 물론 느낌(감정)에도 평생 동안 경험한 방대한 양의 정보가 담겨 있다. 게다가 느낌은 속도도 훨씬 빨라서 생각하는 것보다 더 신속한 판단과 결정을 내리는 데 효과적이다.


하지만 문제는 느낌은 '생각'에 비해 그 판단(결정)의 범위가 굉장히 협소하다는 데 있다. 느낌은 빠른 시간 내에 판단을 내려야 하다 보니 단순하고, 오감에 의존하다 보니 늘 해왔던 대로 판단하려는 관성이 강하다. 그렇다 보니 다양한 음식들을 먹더라도 '맛있다', '맛없다' 내지는 '특이하다' 정도의 감상 밖에 나오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식사를 할 때만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떠한 사회문제를 바라볼 때도 비슷하게 판단한다. '인어공주의 에리얼이 흑인이래', '퀴어축제 중에 지자체와 경찰이 충돌했대'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단순히 '왜 디즈니는 PC주의에 갇혀서 이 모양이지?', '왜 성소수자들은 축제 같은 걸 열어서 문제를 일으키지?'라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생물의 본능은 상당히 보수적이어서 기존에 익숙하지 않은 대상을 마주했을 때 반감이 먼저 일어난다. 여기까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반감을 자신의 판단으로 곧장 연결 짓는다면 들짐승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어느 누구처럼 음식을 '맛있다', '맛없다'로만 결정 내리고 마는 것이다. 


만약 어떠한 반감이 들더라도 ‘왜 이런 반감이 드는 지’를 한 번 더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똑같은 결론일지라도, 자기 의견을 더 설득력이 있고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선 사례에서도 '요즘 디즈니는 마음에 안 들어' 하고 넘어간다면, 에리얼 역을 맡은 배우가 '흑인이어서 싫은 건지', '단지 어울리지 않아서 싫은 건지', '정말 디즈니가 싫은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게 된다. 퀴어축제에 대해서도 '성소수자들은 왜 항상 말썽이지?' 하고 넘긴다면, 내가 정말 '성소수자를 싫어하는 건지', 단지 '퀴어축제가 싫은 건지', '원활하지 못한 축제운영이 싫은 건지'를 영원히 알 수 없다.


우리는 스스로를 '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라고 칭하며 슬기롭다는 의미를 두 번이나 덧붙이고 있지만, 정말 슬기로운 지에 대해서는 한 번쯤 자성해봐야 한다. 슬기로울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과 슬기롭다는  것은 분명히 다른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이다.


※ 위 포스트는 논객닷컴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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