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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션 SEAN Sep 14. 2020

[칼럼] 일의 기쁨과 슬픔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게으른 자는 굶주리게 된다.


하염없이 놀고 있는 누군가에게 우리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는 말들이다. 위 문구들은 성서에서 인용했지만, 비슷한 말들은 동서고금 막론하고 숱한 성인들의 입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정말 일을 하지 않으면 꼭 먹지도 말아야 하는 걸까. 그리고 하필이면 왜,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못한다’가 아니라 ‘먹지도 말라’일까. 이 근원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현대판 노동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농경이 시작되기 전 수렵 사회에서는 누구에게나 그랬다. 우리 몸은 그때에도 일정량의 에너지를 필요로 했고, 스스로 입에 넣을 무언가를 찾지 않으면 그걸로 꽥! 끝이었다. 말 그대로 자급자족(自給自足)의 시대였다. 생산의 총량과 소비의 총량이 거의 일치했다. 하지만 밭에 씨앗을 뿌리고 수확하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생산량은 서서히 소비량을 넘어섰다. 노동의 산물들이 축적되기 시작한 탓이다.


우리가 흔히 재산(財産)이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일평생 노동을 하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지장 없는 계층이 생겨났다. 단지 매번 나다니기 싫어 밭에 씨를 뿌렸을 뿐인데, 의도치 않게 계급까지도 형성된 것이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노동사에는 크고 작은 변화상들이 있었지만 기본적인 행태는 그다지 다르지 않다.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이라면 지금은 노동을 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인구가 크게 늘었다. 기술 발전에 따라 한 개인이 부양할 수 있는 인구가 부쩍 늘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피라미드의 꼭대기층만이 가능했던, 속칭 놀먹(놀고먹는 일)이 가장 밑바닥층까지도 가능해졌다. 인권이 정립되기 전인 근대까지만 해도, 이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현대에는 그게 가능해졌다. 이른바 ‘복지’라는 이름의 호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존엄하며, 일을 하지 않아도 마땅히 살아갈 권리가 있음을 사회적으로 공공연히 합의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부양해야 하는 입장은 조금 다르다. 위 자료는 2018년 전체 근로자들의 통계다. 이들은 한 달 동안 평균 19.5일, 156.4시간을 일하고 있다. 휴일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날에 8.02 시간씩 꼬박꼬박 일하는 셈이다. 60세 이상의 노령 근로자들도 19일로 크게 다르지 않다. 인권, 좋다. 인간의 존엄, 좋다 이거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일평생을 일의 구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의 권리는 누가 챙겨주어야 한단 말일까.


근처 버스정류장에 음료수나 잡다한 걸 사러 가끔 들르는 편의점이 있다. 족히 일흔다섯은 되어 보이는 지긋한 할아버지가 혼자서 운영하는 가게다. 아르바이트생도 없이, 주무실 시간이 되면 문을 닫고 다음 날 이른 시간에 다시 문을 여는 곳이다. GS25의 간판을 달고 있지만 내부 구성은 오히려 20여 년 전의 구멍가게와 닮아있다.


이등변 삼각형 모양의 점포에 들어서면 보통 편의점과는 다른 물품 배열이 눈에 띈다. 일반적으로는 서비스 테이블로 비워두었을 공간에도, 펜이니 연필이니 하는 작은 물건들이 빼곡하다. 본사에서는 대체 무얼 하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매번 어서 오이소’ ‘가입 시다’하며 90도로 인사해주시는 할아버지를 보면 정작 마음은 또 그렇지 않다. 나도 따라서 직각으로 허리를 숙일 따름이다. 이른바 노동의 신성함에 대한 경배다. 통신사 할인 따윈 안 받아도 그만이다.

한 번씩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미래의 복지 행태로 기본소득제가 언급된다. 누구에게나 조건 없이 살아가기에 적당한 생계비를 보장해주는 제도다. 사회적으로 개인을 노동의 당위에서 해방시키고, 경제적으로도 기초 소비층을 형성하자는 취지다. 물질이 풍요로운 현대 사회에서는 소비의 주체만으로도 인간은 존재 가치가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일부의 생산만으로도 전체의 소비를 충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이 제도가 가능하려면 우리 중 일부는 언제나, 나머지 절대다수를 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먹고살만한 사회에서, 누가 굳이 본인의 자유와 시간을 희생하며 일을 하려 들까. 아무리 생산기술이 발전하고 좋은 대우를 해준다 해도 말이다. 그러고 싶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본인이 감정이 없는 기계가 아니라면 말이다.


나 또한 기본소득제에는 기본적으로 찬성하는 입장이다. 나도 여가의 가치를 충분히 알고 있고 사랑한다. 하지만 이 제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노동에 대한 인식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현재의 노동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개인의 소중한 자유와 시간을 마땅히 희생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발 벗고 나서 자신을 내던지고 싶지는 않다. 그렇기에 더욱이 노동의 개념부터 바뀌어야 한다. 지금처럼 꼭 해야만 하는 당위로서가 아니라, 생활 속에 하나의 작은 활동으로 들어와야 한다. 우리가 밥을 먹고, 거부감 없이 차를 마시는 것처럼 말이다.


현실적인 방안으로는 외국의 스타트업처럼 근무 시간을 가능한 한 자유롭게 하고, 업무 중에도 최대한 자유를 보장하는 식이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일을 하기는 하되 개인의 부담을 크게 덜어주는 것이다. 이렇게 한 걸음씩 일 문화를 바꾸어 가다 보면, 당장은 무리일지라도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잘 살아갈 수 있는 이상 사회도 만들어질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지금껏 정말 말도 안 되는 엄청난 일들도 해오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번에도 분명 별 문제없을 것이다.


※ 위 포스트는 논객닷컴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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