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는 우리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수적인 요소다.
만일 우리가 의식주를 충분히 보장받는다 한들 문화를 향유할 수 없는 삶에서는 진정한 행복을 꿈꾸기 힘들다. 인간이 꼭 생존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국민의 행복추구권을 보장하는 우리 헌법에서는 이러한 문화향유권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헌법상 명시하는 이 권리가 실생활에서는 잘 지켜지지 않고 있는 듯하다.
혹은 일부 지역의 국민들에게만 한정하여 적용되는 듯하다. 이른바, 수도권과 지방의 문화 격차에 대한 이야기다.
아비뇽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에서는 전쟁으로 국민들을 단결하고 손상된 자긍심을 회복하기 위해 문화정책을 그 방편으로 삼았다.
하지만 당시의 프랑스도 지금의 우리나라처럼, 대부분의 예술활동이 파리에 집중되어 있어 전 국민이 문화생활을 향유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이에 프랑스 정부는 정부 차원의 대대적인 문화확산 정책에 착수하여 지방 대도시를 중심으로 ‘국립연극센터’에 재정을 보조하기 시작했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함께 나서서 지역 연극문화를 활성화하기 위해 앞장선 것이다. 이 시기에 탄생한 축제 중 하나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비뇽 페스티벌(Avignon Festival)’이다.
연극의 민주화와 대중화를 추구했던 연극감독 장 빌라르(Jean Vilar)는 1947년 프랑스 남부의 소도시인 아비뇽에서 아비뇽 페스티벌의 전신인 아비뇽 연극 주간(semaine d'art dramatique)’을 개최했다.
이때 무대에 올린 세 편의 연극은 관객들의 열렬한 호응을 이끌어내며, 지방에서도 국가 전체의 유행을 선도할 수 있다는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소속된 지역과 관계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문화 축제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문화 민주화’ 개념은 후대의 감독들에게도 전승되며, 지역적‧경제적‧교육적 차이를 극복하고 전 국민이 즐길 수 있는 프랑스 문화의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지금, 2021년의 대한민국에서는 ‘문화 민주화’가 여전히 머나먼 이야기로 느껴진다.
편파적인 중앙정부 정책
1995년 지방자치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이후 중앙정부의 기능은 상당 부분 지방정부로 이양되어 왔다. ‘지방분권’이라는 미명 하에, 지방정부에서 지역의 특수성과 실정에 맞는 행정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지역의 정치‧경제‧사회 등 여타 정책들과 달리, 유독 문화 정책에서는 지방정부의 자체적 방향성보다 중앙정부의 내밀한 의도를 앞세우는 측면이 강했다. 이는 민선 7기를 지나고 있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특히 지난 4월, 문화체육관광부가 추진한 ‘이건희 기증관’의 독단적 입지선정 과정은 중앙에서 지방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중앙정부는 대규모 국립 문화시설을 건립하는 데도, 지방정부와의 그 어떠한 협의나 공론화의 과정 없이 ‘서울’로 입지를 결정했다. 대규모 국립 문화시설은 당연히 서울에 있어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이처럼 국가권력의 상당 부분을 가진 수도권에서는 지금껏 매우 편향적인 문화정책을 펼쳐왔다. 지방 문화빈곤 현상을 등한시한 채, 오로지 수도권의 문화만을 더욱 융성하게 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미 전국의 주요 문화시설 중 대다수가 수도권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부는 또 한 번 일방적 입지선정을 통해 중앙이 지방을 얼마나 홀대하고 있는지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앞으로 이러한 행태가 지속된다면, 수도권과 지방의 문화 격차는 점점 더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질 것이 뻔하다. 최근 들어 부산, 대구를 포함한 전국의 수많은 지자체에서 그토록 수도권 일극주의에 강력히 비판하고 반발에 나선 이유다.
문화분권을 위한 방편
문화분권의 실질적 달성을 위해서는 우선, 정부 위주의 정책 생산‧집행 체계부터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지방은 정부 정책의 단순한 실행체에서 벗어나 자체적으로 정책을 생산하고 집행할 수 있어야 한다. 지역에는 지역에 알맞은 정책이 요구되기 마련인데, 해당 특성이 반영되지 않은 일률적인 정책은 매우 비효과적이다.
따라서 정부에서는 지방 문화정책의 자율성을 보장함과 동시에, 관련 예산을 지자체로 편성하여 지역 문화예술계가 자력으로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보장해야 한다.
또한 지자체에서는 예술가‧시민‧행정가‧활동가‧기업 등 지역 문화생태계 구성원들이 각자의 정책 방향성을 공유하고, 그 필요성을 공감할 수 있는 담론(Governance)을 형성해야 할 것이다.
지역문화의 향유 주체들이 직접 정책 생산과정에 참가하고, 도출된 결과를 몸소 실행에 옮기는 것만큼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은 없다.
이와 같이 문화생태계의 구성원 모두가 관심을 갖고 움직여야 시대의 흐름에 맞는, 어느 누가 소외되지 않는 지역문화를 만들 수 있다.
아울러, 지역 문화의 생산‧유통‧소비가 활발히 이루어지려면 예술뿐 아니라 복지‧환경‧교육 등 타 사회 영역과의 협업도 요구된다.
문화는 본연의 다양성과 포괄성을 바탕으로 함께할수록 커지고 나눌수록 풍요로워지는 특징이 있다. 예술과 복지, 예술과 환경, 예술과 보건 등 서로 다른 영역을 한 자리에 엮기만 해도, 또 다른 새로운 문화가 탄생하며 상생효과를 만들어 낸다.
효과적인 지역문화 정책은 해당 지역을 더욱 융성하게 할 뿐 아니라 실질적인 경쟁력까지 제고한다.
모두를 위한 문화분권
문화분권이 달성되면 지역에서는 주민의 참여와 자치를 토대로, 이들의 적극성과 창의성으로 이루어진 고유의 문화를 구축할 수 있다.
이러한 지역문화의 주권회복은 국내 문화다양성을 보전할 뿐 아니라 지역 간 문화격차를 해소함으로써 국가 전반의 균형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
일찍이 지역문화 진흥을 위한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으나, 실질적인 문화분권이 이루어지지 않은 현시점에서는, 중앙정부의 지방정부에 대한 자율성 보장과 지역 문화생태계 구성원들의 담론 형성이 무엇보다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 위 포스트는 논객닷컴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