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달리 Aug 22. 2023

(1)영화 엘리멘탈에서

우주의 원리

 세상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 불, 공기, 흙 이 네 가지가 세상을 구성한다고 봤다. 이것들은 타로의 마이너 카드에서도 볼 수 있으며, 이를 이용해 인간의 삶을 점친다. 

 동양의 사주명리에서는 우주를 이루는 기운을  목, 화, 토, 금, 수 5행으로 나눈다. 우주의 섭리에 따라 인간의 삶도 좌우된다고 보며, 이 우주의 법칙을 인간사에 적용해 길흉화복을 알아본다. 


 우주의 에너지는 생사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좋고 나쁨의 구별은 없다. 좋은 일이 오면 나쁜 일이 따라오고, 나쁜 일을 겪으면 좋은 일을 예상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살아나서 소명에 따라 소멸하며 그 반대급부로 죽음에서 새롭게 탄생한다. 이것을 음양의 조화, 태극의 원리라 한다.  

 그러니 지나치게 좋아할 필요도 없고, 절망하여 쓰러질 필요도 없다고 한다. 언제나 좋을 수만도 나쁠 수만도 없다. 감정에 매몰되어 자신을 괴롭히느라 삶을 허비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삶은 그 자체로 고통이 된다. 과도한 집착은 삶의 조화를 깨뜨리고 세상을 파괴한다. 

 그러나 알면서도 직접 실천하기란 어렵다. 간지러워 긁고 싶지만 손이 닿지 않아 미칠 것 같은 달뜬 마음과 같이 조급해지기만 한다. 나약한 나의 마음 하나 바꾸는 것이 세상을 구하는 일보다 어렵다.   




 영화 ‘엘리멘탈’은 물, 불, 공기, 흙으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불과 물이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고 깨달아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서로 맞닿을 수 없을 것 같은 두 존재(물, 불)가 상대를 두려워하는 대신 공생의 길을 모색한다. 물과 불은 서로의 파괴자가 아니다. 파괴자의 길을 걷는 대신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선택한다. 그리고 더 높은 가치를 창조한다. 

 함께 하는 삶, 잊어버리기 너무나 쉬운. 

 삶의 가치를 생각하지 않고 살기에 쉬운 세상이다. 




 사람의 감정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극과 극에 달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나 역시 기뻐서 날아갈 것 같다가도 슬퍼서 죽겠을 때 고꾸라지는 감정의 변화는 내가 미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편차가 크다. 좋을 일만 생기면 좋으련만 세상은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다. 좋은 일은 작게 오고, 나쁜 일은 크게 오는 것 같은 세상, 그때 감정이 널을 뛰는 기분이란 진짜 뭣 같다. 

 이 빈곤한 마음을 다독일 수 있는 것은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중용의 도, 태극의 원리이다. 


 경험으로 발현된 격한 감정을 조절하고 고요함을 유지하고자 하는 마음. 

 노력은 했으나 성공은 어렵다. (아마도 평생 성공하기 힘들 것 같은 느낌.......) 

 머릿속에 든 것을 가슴이 받아들이는 것은 찰나의 깨달음을 얻지 않으면 어렵다. 그리고 그 찰나는 오랜 시간의 노력과 수련의 결정체이다. 

 게다가 중용의 효용가치를 의심하는 마음까지 든다면, 그것은 영락없이 실패다. 




 왜 내가 기쁜 마음을 표현하지 말아야 해? 

 내가 기분 나쁜데 남들 눈치까지 봐야 하는 거야, 그럼 내 기분은 어떻게 해?

 요즘엔 자기표현 못하면 병신이야 병신!

 내가 배려하면 나는 누가 배려해 줘?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개인의 수양을 미덕으로 삼던 시대는 지나가고 누구나 유명인이 될 수 있으며 스스로를 광고할 수 있어야만 잘 살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90년대 초반만 해도 거리낌 없는 청년층의 모습에서 우리는 억눌러 있던 자유를 즐길 수 있었다. 보수적인 사회는 개방적으로 변모했다. 집단 속의 개인이 온전히 개인 그대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는 구심점 없이 또 다른 방향의 극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너도 나도 자신의 욕구만을 강하게 표현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도태된 자로 치부한다. 개인의 자유를 즐기는 시대는 지나가고 서로의 자유를 침해하는 시대가 왔다. 


 과거 마음을 수양하고 감정을 숨기는 극한의 음의 시대였다면, 현재 무분별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극한의 양의 시대이다. 과거의 극한이 현재의 극한으로 변했고, 세상은 여전히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또다시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고 감정들이 폭발했다. 


 술을 마시면 좀 그럴 수 있지, 

 네가 뭔데 내 애를 괴롭혀. 우리 애가 재미로 그런 건데 그걸 그렇게 받아들이나.

 손님이 왕인데, 종업원이 그래도 돼?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상대의 간섭에 아니꼬운 시선을 보낸다. 

 이른바 갑에 위치한 사람들은 지위가 자신들의 가치를 증명한다고 생각한다. 갑이라면 응당 을에게, 무엇을 하든 을은 넙죽 엎드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사회는 이를 부추긴다. 노사관계에서 사제관계에서, 한쪽에는 무한한 권리를 한쪽은 무한한 의무를 부여받는다.      

 인간관계에서 편향된 무한한 존중이라는 게 말이 되는 걸까?

 사람은 누구나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책에서나 나오는 신화 같은 이야기인 걸까? 

 

 언론에서 폭력적인 상해사건, 고용주의 고용인 탄압 등을 취재하면서 인간의 존엄가치에 대해 열변을 토한다. 그러나 거대 언론 역시 권력에 붙어 자신의 안위를 고민하는 행태를 수없이 보여 왔다. 비단 언론뿐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 크든 작든 정의보다는 자신의 평안을 추구한다. 그랬으니 우리는 진실로 정의를 외쳐봤자 소용없는 일인 것일까? 

 정도를 말하는 사람들은 외면당하고 웃음거리가 된다. 소수가 다수를 이끌기에는 세상은 빨리 변하고 있다. 배려는 개나 주고, 각자도생 하는 게 맞은 일일까?     


*이어서 


작가의 이전글 불편한 위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