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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합기의 고뇌

문득 고해성사, 참회를 하는 시간

by 유달리

사무실에서 업무를 하다 보면 문서를 복사하고 종이 문서를 스캔할 일이 종종 있다.


그럴 때면 하루 종일 꼼짝 않고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멀찍이 떨어진 복합기 앞으로 다가선다.


지이잉…


키보드 소리만 들리는 사무실을 일순 깨우는 복합기의 소음은 주목받고 싶지 않은 나의 마음을 흩트려놓는다.


분명 일을 하고 있는데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어쩔 수 없는 , 강요된 의지가 쓸데없이 과장된 행동을 야기한다.


굳이 보지 않아도 되는 복사 용지를 한번 더 들춰보고, 수없이 읽어본 복합기 사용 설명서를 하릴없이 읽기도 한다.


일을 안 하는 건 아니지만 더욱 열심히 하는 척을 하는 거다. 자료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숨 막혀서.


성실한 직장인 역할놀이에 빠져서 하는 행동은 별 일이 아니다. 그냥 지나치면 될 일.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업무를 하는데 보내느라 지쳐버린 마음은 나의 행동에 야유를 보내고,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만든다.


과연 나는 잘 살고 있는 것인가?


뭐 어때. 여기 있는 누구나 이렇게 사니까 이것은 당연한 일이겠지…


하루를 이렇게 보내는 것이 직장인으로서 맞는 행동이지…


그래. 맞아, 누구나 이렇게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하기도 하지.


그게 지금 이 순간의 나인 것일 테고.


그러니, 생각을 줄이면 될 일이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단순 명료하게 바라보는 것.


그것이 삶을 나아가게 하는 것임을 알지만, 왜 늘 복합기 앞에선 그게 잘 안 되는지 모르겠다.


머리를 쓰든 손을 쓰든 뭔가를 집중해야 딴생각이 안 들 텐데, 복합기에서 자료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쓸모없는 생각들이 업무에 지친 뇌신경의 빈 공간을 뚫고 들어와 똬리를 튼다, 일탈을 속삭이며.


그래서 복합기 앞에서 고요히 서 있는 동안에 나의 뇌는 단 한 가지를 목표로 조급하게 움직인다. 이룰 수 없는 퇴근의 가능성을 점치기 위해.


퇴근만이 이 숨 막히는 철창 밖으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이라며.


자유를 원한다고.


복합기에서 나온 자료를 들고 자리로 돌아가면서 나는 또 생각한다.


그리고 세상 조용히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응시한다.


피식. 속웃음을 웃는다.


참… 나도 고달프게 사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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