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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타기와 여백의 미

말투

by 유달리


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어렸을 때부터 드라마나 영화 전개 상 아직 나타나지 않은 뒷얘기에 밤잠을 설쳤고 나의 예상을 벗어나는 전개에는 손에 땀이 나도록 긴장하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감정에 동화되며 함께 따라 울고 웃었다. 그런데 간혹 그들의 표정과 말투에서 행동의 의미를 간파하기가 힘들 때가 있다. 특히 해외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그런 경우가 있었다. 문화가 달라 그들의 감정선과 표현 방식을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기에 충분히 그럴 만했다. 그러나 세계 공통적으로 보편타당하게 여겨지는 상황에 인물들의 반응이 나와 다를 때면 내 머릿속에는 수 십 개의 물음표가 떠올랐다.


물론, 맨 처음의 반응은 왜 그들은 그렇게 반응하는가? 그들의 어떤 문화가 그들이 그렇게 반응하도록 만들었는가? 그리고 왜 난 그것이 이질적인가? 였다.

예를 들어, 미국 드라마에서 친구나 가족들과 격렬히 싸우고 돌아선 후, 나의 생각으로는 다시는 관계를 회복할 수 없을 것 같은 문제로 서로에게 거친 말을 내뱉은, 상황이 변하자 아주 쉽게 서로 가벼운 악수를 나누며 관계를 회복할 때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유행했던 쿨병이 일상인 것 같은 느낌. 그런 상황을 맞닥뜨릴 때마다 나는 그들의 가벼운 감정에 놀랐고, 시대에 뒤처진 것 같은 나의 대쪽 같은 생각에 놀랐다. 그러나 그것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의 유연함이 관계의 성장을 만든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무엇이든 부러뜨릴 수 있는 강함은 결국 자신도 부러뜨려버린다는 것을 몸소 겪고 나서야 말이다.


그러나 문화의 차이에 따른 성격과 행동 방식의 다름을 인정했지만, 여전히 궁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인정했다고 해서 감정선을 따라갈 수 있게 된 것도 아니었다.

왜 저 장면에서 저렇게 말을 하는 걸까? 왜 나는 불편함을 느끼지? 나의 감정의 크기가 인물과 같아지지 않아.


솔직히 말하자면 특히 일본 드라마와 영화를 볼 때 그런 감정을 종종 느꼈다. 굳이 과장해서 얘기할 필요가 없는데 과장하는 듯 보였고 슬퍼야 할 때 슬픔의 느껴지지 않는 인물들의

보일 때면 등장인물과 나는 영원히 평행선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작품들과는 감정을 충분히 공유했다.)

그러나 일본의 역사와 사회 전반의 문화를 보면 그들의 행동양식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두려움이 있고 상대의 기분을 살피는 데 유독 특화되어 있는 사회 속에 성장한다면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이해한다. (한편으로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나의 태도도 비슷한 면이 있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물론 이해로도 완벽하게 합치하지 못해 벌어진 그 틈 사이의 불편감을 빼면 말이다.


그리고 그 불편함의 기저에 무엇이 있는지를 고민했다. (볼 때마다 그런 생각들을 떠오르는 건 나의 고질적인 습관 중 하나이다.)

어쨌든 여느 날처럼 영화를 보다가 문득 유레카를 외친 순간이 찾아왔다.


그것은, 들쑥날쑥한 속도와 말 늘임, 그리고 말 줄임표…….


왜 그런 생각을 진작에 못했을까?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 드라마를 보면 인물들이 세차게 말을 몰아칠 때도 있지만 단어 사이를 지루하게 늘어뜨리거나 말을 생략하고 미묘한 표정만으로 말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다른 나라의 드라마를 생각해 보면 전혀 달랐다. 서양권 인물들은 좀처럼 말을 줄이거나 생략하지 않았고, 한번 말을 뱉으면 중간에 말을 쉬는 경우도 많지 않았다. 오히려 의견을 빨리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게다가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말을 시작할 때 뜸을 들이며 말을 하거나 말미에 생략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우리가 문장 안 단어 사이를 리듬을 타며 음을 올렸다 내리고, 말을 길게 뺐다가 갑자기 랩을 하듯 말을 하지는 않았다.

즉 우리나라처럼 실제 발음과 다르게 화자의 현재 상태에 따라 단어를 늘이거나 억양을 바꾸거나 갑자기 말을 먹어버리는 경우가 적었다.


흡사 우리나라 말투는 줄광대의 줄타기와 같은 것이다.

관객은 줄 위에 선 광대의 몸짓에 한껏 웃다가 순간 침을 꼴깍 삼킨다. 결국 어떤 식으로든 줄타기는 끝이 나지만 그 과정은 아슬아슬 흥미진진하다.

그런 역동적인 몸짓이 우리의 DNA에 박혀 우리의 말투 또한 그 기질을 닮은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채우지 않은 여백의 미와 같은 것이다.

우리나라는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했고 모든 공간을 빽빽이 채우는 것을 지양하며 비어있는 것의 아름다움을 강조했다. 그것은 회화에도 잘 표현되어 있다. 한옥이나 그림 속 비어 있는 공간에 바람이 들고 생각이 흐르고 여유가 흘렀다.

우리의 말에도 여백이 흐른다. 모든 것을 말로 하지 않고 느닷없이 말을 멈추며 대화 사이에 공백이 흐른다. (그것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만 그것 또한 우리 문화적 특징일 것이다.)


그렇다.

나는 태곳적부터 내려온 한국인의 기질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이다. ( 보통의 사람들과 다른 기질로 불편함을 겪고 있다 해도, 어떻게 해서든 나는 그 줄기와 닿아 있던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말이 아닌 다른 나라의 말을 들으며 어색함과 신기함을 느꼈던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말투에서 느껴지는 다양한 표현들에 좀 더 애정을 가지게 되었고 다른 나라 말투에 녹아있는 문화를 좀 더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에는 상대의 태도에 대한 의문으로 고심했으나 곧 그 대상을 나로 바꿔 나의 기질 안에 자리 잡은 한국의 특수성을 관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온전히 나만의 결론이다. 나는 언어학자도 아니고 문화학자도 아니다.

그러나 한 민족의 문화가 그 민족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

그러므로 우리를 형성한 요소 중 어느 것 하나 영향을 끼치지 않은 것이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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