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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달리 Sep 04. 2022

헬린이를 특가에 모십니다

이제 그런 말은 쓰지 않습니다




    아스팔트 위의 지렁이가 말라죽을 만큼 더운 계절이 되면 사람들은 땡볕에서 살아남기 위해 하나둘 옷 가죽을 벗어던진다. 이때쯤 길거리에는 새로 생긴 헬스장 홍보 전단지가 많이 보인다. 그중에 올해는 이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헬린이를 위한 오픈 특가 행사! PT 회당 3만 원!


    이곳이 어린이 전용 헬스장은 아닐 테니, 여기서 말하는 ‘헬린이’는 이제 막 운동을 시작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다. 무언가 처음 시작하는 초보자를 일컬을 때, ‘-린이’를 접미사로 사용하는 언어유희가 유행하여 2022년 상반기 기준 ‘#헬린이’ 해시태그는 인스타그램에서 394만 번이 쓰였고 이 단어 외에도 주린이(주식 초보자), 캠린이(캠핑 초보자), 부린이(부동산 초보자), 골린이(골프 초보자) 등이 꾸준히 언급되고 있다. 인터넷에서 시작된 이 표현은 단순히 개인의 SNS에서만 그치지 않고 거리와 매체를 점령 중이다. 아이들을 위한 교육 방송을 제공하는 EBS의 영상에서도 헬스트레이너와 함께 운동하는 초보자를 ‘헬린이’라고 표현했으며, 공중파 SBS에서도 자막에 ‘헬린이를 위한’, ‘눈 뜬 헬린이’ 등의 말을 자연스럽게 방영했다. 이런 말들,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는가? 어쩌다 이 어른들은 어린이가 돼버린 걸까? 과연 어른들은 어린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햄 좋아하세요? 초딩 입맛이시네요.”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던 이가 내게 말했다. 식탁 위에 있는 콩자반, 오이소박이, 비름나물을 지나치고 달걀을 묻혀 구운 분홍 소시지만 쏙쏙 집어 먹는 내 모습을 보며 장난스럽게 건넨 말이었다.


    “나물에는 손도 안 대시길래요.”


    ‘초딩 입맛’이란 단어를 밥알과 함께 씹으며 곰곰이 생각해봤다. 진짜 '초딩' 시절의 나의 입맛은 어떠했을까? 유년기 나의 밥도둑은 물에 씻은 신김치였다. 어디 대충 몇 개월 묵혀둔 정도가 아니라 최소 일이 년을 냉장고 안에서 무소식이 희소식이 될 만큼 푹 익혀야 내 입맛에 참 잘 맞았다. 그만큼 충분히 익은 묵은지 한 포기를 꺼내다가 찬물에 착착 씻어 맨손으로 배춧잎의 머리꼭지부터 찢어 밥에 돌돌 감싸 먹으면 그만한 진미가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벌겋고 칼칼한 선짓국, 얼큰하고 물컹한 알탕, 이런 맛들이 초등학생 시절 나를 기른 입맛이었다.


    그러다 달고 짠맛을 찾기 시작한 게 최근이다. 그러나 내게 초딩 입맛이라고 한 이들은 이런 사실과 상관없이 그들만의 가상의 입맛 피라미드가 있고, 그 꼭대기에 취나물, 장아찌, 오이냉국이 있으며 피라미드의 중층부에는 육고기가, 최말단에 옛날 소시지, 치킨 너겟 같은 음식이 있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피라미드 최말단에 머물러있는 나의 입맛을 보고 '미숙하다'는 뉘앙스로 '초딩'이란 수식어를 붙여가며 아무렇지 않게 후려칠 수가 없다. 괜스레 어린이(였던 것)를 대표하여 반기를 들어본다. 입맛 따위에 우열은 없을뿐더러 초등학생은 미숙하지 않다. 내가 ‘초딩’ 때 얼마나 ‘완전한’ 입맛을 가졌는지도 모르면서 그런 말을 하기는! 나는 밥상머리 혁명을 속으로 꿈꾸며 입만 괜히 부루퉁해져선 관심에도 없는 콩자반을 몇 번 휘적거렸다.


    책 『거리의 언어학』에서 사회언어학자 김하수는 언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언어는 무척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구조가 형성되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지적이며 문화적이고 심리적인 활동이 그 안에 담겨 들어갔다. 지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더 복잡하고 은밀한 기능을 가진 감정적 요소까지 헤아린다면 언어는 인간의 다양한 인식과 감각, 믿음과 정서 등이 겹겹이 쌓인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복합체이다.”


    즉 우리가 갓 무언가를 시작한 어리숙한 어른을 데려다 ‘어린이’에 비유하는 행위는 은연중에 ‘어른은 항시 성숙하고, 어린이란 그와 반대로 덜 자란 어른에 불과하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회 모두가 어린이는 존중받아야 한다고 외치더라도, 실제로 우리가 뱉는 언어는 그럴 생각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고정관념은 어린이를 칭찬할 때도 드러난다. 남들보다 의젓하고 사고의 폭이 깊은 어린이에게 ‘애어른’이라는 칭호를 달아주거나 “참 어른스럽다.”라고 말하는가 하면, 품성이 바른 어린이를 격려할 때 아무렇지 않게 “이대로 크면 훌륭한 어른이 되겠네.”라고 말한다. 그저 “생각이 깊고 참 훌륭하구나.”라고 말해주면 될 것을.




     분명 우리의 유년은 미완성이 아니었다. 풍부한 감정,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배워가며 어떤 일은 능숙하게, 또 어떤 일에는 미숙하기도 한, 어른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다. 우주처럼 풍부한 어린이라는 존재를 단순히 작고, 귀엽고, 미숙한 존재로 대상화할수록 고독해지는 자는 어른이다. 반대 선상에 놓인 이들을 두어다 한쪽은 미숙하고 한쪽은 성숙하다 일컬으니, 과거보다 완성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어른의 부담감만 늘어날 뿐이다. 대단한 무언가라도 이루어야 할 것 같아 괜히 움츠러들게 된 어른들이 ‘-린이’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된 이유는 부담 없이 도전하고 싶고, 미숙해도 귀여워 보였으면 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더더욱 이렇게 말하고 싶다.


    어른이여, 당신의 어리숙함이 아기자기해 보이기 위해 더는 ‘어린이’를 이용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지 않아도 무언가 해내려는 그대란 어른은 그 자체로 충분히, 멋지고 귀여우니까.




 브런치에 오지 못한 2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좋은 기회가 생겨 책을 쓸 수 있었습니다.

 2022년 10월에 출간될 예정입니다. (와아!)

 서로 상처받지 않는 사회를 위해 차별 언어에 대한 제 생각을 담았습니다.

 해당 글은 책에 실린 원고 중 하나입니다.

 정확한 출간 일정이 나오면 브런치에 제일 먼저 알려드릴게요.


 반갑습니다. 정말 보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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