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거나 물어뜯기거나, 둘 중 하나

by 우당탕탕

고로, 내 자아는 2021년 11월 20일에 사망했다.


정확히 내가 첫 직장을 다니면서부터였다. 나는 그 시절의 나의 자아를 애도한다. 처음 저격당했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했기에.


아직도 선명했다. 대뜸 여자애들은 왜 그루프를 쓰는 거야?로 시작되는 실장님의 말부터, 얜 아직도 이걸 모르고 있었어, 라며 온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1개월짜리 신입을 비웃는 팀장님까지.


아니, 이런 정글의 법칙이 있다고 말해줬다면 나도 맹수로 길러졌을 텐데요.


안타깝게도, 난 부모님의 사랑을 너무 많이 받은 초식 동물이었다. 아주 잡아먹히기에 딱 좋은.


그리고 여전히 나이 든 초식동물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는 조카들을 보며 말한다. 오빠. 얘네 착하게 키우지 마. 악독하게 키워. 차라리 못된 놈이 나아. 내가 정신병 얻는 것보다 다른 새끼들 정신병원 보내는 게 낫잖아?


부끄럽게도 5년간의 정신과 경력은 그렇게 발고되었다.


여전히 사회적으로 터부시 하는 정신과에는 사람들이 북적였다. 무려 한 시간 반이나 기다려 들어갔다. 진료실은 뚝딱뚝딱 바쁘게 약을 지어 나가던 사람들이 무색하게, 평온해 보였다. 필시 수십 년 동안 유지하고 있을 선생님의 저 자애로운 표정 때문이리라.


"선생님. 사람들 앞에만 있으면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요."


"트라우마가 있나요?"


"아니요. 그냥 사람들이 무서워요."


"과거에 그랬던 경험이라거나."


"없는데요."


선생님은 몇 가지 약과 약의 효능을 설명해 주고 날 10분 만에 내쫓았다. 내 손엔 선택적 세로토닌 제흡수 억제제와 인데놀이라는 약이 들려있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 한참을 고민했다. 정신과란 응당 트라우마가 있어야 하는 건가? 그렇다면 내일이 내 트라우마가 될 거고, 다시 회사에 출근하는 다음 주가 나의 새로운 트라우마가 될 텐데.


어떻게 그걸 과거로만 자부하나요.


차고 넘칠 10분이라는 시간 동안 선생님은 8분을 말했고 나는 2분을 말했다. 평생 내 정신과 기록에서 가장 많이 말한 날이었다.


"여기 앞에 카페 새로 생겼더라~ 완전 힙해~"


명소를 찾아 삼삼오오 떠나는 그녀들 사이에 끼어 나는 마시지도 못하는 커피 메뉴를 피해서 그나마 남은 초코라떼를 하나 시켰다. 사실 난 단 걸 별로 안 좋아했다. 그녀들이 돌아가면서 커피를 쏘는 커피 타임에 날 끼워줬을 뿐이었다. 사회성 없는 나를 위한 소소한 배려랄까.


"어머 그러면 뭐 먹고살아!"


음식의 미학에 대해 늘어놓던 과장님이 내 허벅지를 탁 때렸다. 먹을 줄을 몰라서 못 먹는 거라느니, 그럴 바엔 자기와 함께 맛집 탐방을 가자느니, 호응하는 무리들이 늘었다.


내가 추구하는 건 비움의 미학인데, 오늘 낭비한 이 초코라떼는 또 어떻게 버려야 하나요. 사무실로 돌아와 나는 화장실로 도피했다. 여기가 나만의 명소라구요. 창문 달린 맨 끝칸. 아무도 없는 화장실의 적막을 만끽하다가 차장님의 퍼런 구둣발 소리가 들리면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변기물에 남은 초코라떼를 흘려보냈다.


돌아오는 복도에 홀연히 놓인 비상계단도 내 명소 중 하나였다. 출금 내역과 구인구직 사이트를 조용히 확인하기 제격인 나만의 비밀장소.


사람이 행동을 외향적으로 하면 성격도 외향적으로 바뀐다는데. 어째 난 사회생활을 하면 할수록 동굴 같은 장소를 자꾸만 찾게 되었다.


사회성 좋은 인간인 척하는 기계의 말로였다. 아무리 껍데기를 갖다 붙여봤자, 속은 곪아갔다.


이상하게 회의실의 공기는 숨이 막혔다. 아무도 없는데도 눅눅한 먼지 냄새가 났다. 분명 범인은 저 빔프로젝터다. 저 빔프로젝터가 있는 곳은 다 이렇게 불온한 냄새가 났다.


"팀장님, 이거 어떻게 책임지실 거예요? 네?"


고성이 오가는 회의실에서 나는 습관처럼 숨을 죽였다. 대게는 목소리가 크면 이길 줄 아나 본데 그냥 뒤집어진 물방개가 몸부림을 치는 것만 같았다.


왜 내 말 안 들어줘. 왜 내 말 안 들어. 너 왜 내 말 안 듣냐고!!


귀가 터질 것만 같았다.


이럴 거면 그냥 단독으로 불러서 말하지. 왜 꼭 낯선 이들 앞에서 공개망신을 줘야 하나. 내 체면 하나 세우려고 저 사람의 체면은 생각 안 하는 건가. 그러는 본인은 아이조차 사람들 앞에서 안 혼내면서.


참, 개인의 모순이란 이토록 갸륵하다.

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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