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종 위기종 한국인으로 사는 법

by 우당탕탕

저열하게 끓던 감정을 모두 날려버리고 사무실에 앉아도 여전히 허기가 졌다. 꼭 팀 단위로 식사를 하고 오면 이 모양이었다. 바삐 오가는 젓가락, 하필 빈접시에 가깝게 앉은 나, 오늘따라 먼 셀프바, 국자는 어디에 놓아야 할지, 집게는 누구 앞으로 놓아야 할지, 수많은 계산이 오가는 물비린내 나는 전장. 동태찌개 대전을 한바탕 치르고 오면 오후는 녹초다.


안타깝게도 나는 커피를 마시지 못했으므로 수혈도 어려웠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깔깔한 입안을 헹굴 민트티가 전부였으므로, 이미 서너 번 우려낸 누런 물을 마시며 오후 업무를 시작했다.


"나나씨, 이거 대표님이 지시한 거예요?"


"네, 그래서 수정안 업로드해 뒀는데... 무슨 일 때문에 그러세요?"


"... 아니, 대표님은 왜 또 말 바꿔요? 진짜 한두 번도 아니고."


"클라이언트 요청 때문에 그러신 것 같던데."


"나나씨는 불만 없어요? 여긴 맨날 나만 나쁜 년이야. 맨날 나만 대표님한테 싫은 소리 하지. 에휴."


n년차 직장인이라면 이 정도는 못 들은 거다. 들은 것도 못 들은 척하며 사는 마당에, 들리지 않는 작은 속마음까지 들을 필욘 없지 않은가. 이미 소음으로 닳고 닳은 낡은 귀를 가지고 사치스럽게 3번이나 우린 민트티를 한번 더 우리러 가면, 김주임이 나를 붙잡고 의자에 앉는다.


"최대리 님 그만 둔대요. 들었어요?"


"왜요?"


"김 부장님이 엄청 괴롭혔잖아요. 꼽주고. 진짜 개못됐어."


그러는 김주임 본인은 작년에 신입을 괴롭힘으로 내쫓지 않았던가. 신입이 개인사유로 퇴사한다고 했지만, 이미 그녀의 괴롭힘은 네모난 사무실의 모든 파티션을 훑은 후다.


"어머, 어떡해."


잘 알지도 못하는 최대리를 오만하게 동정하고나서야 나는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최진원 대리의 메신저 창을 띄우고 난 보내지도 못할 메시지를 적어 넣었다.


부러워요. 이제 점심은 자유롭게 먹겠네요.


"제주도 다녀왔어요"


휴가를 끝낸 차장님의 말이었다. 어머, 부러워요. 어떠셨어요? 사실 그녀의 감상이 중요하겠나? 당장 제주도에 가고 싶은 내 마음이 중요하지.


"거기 사는 사람들은 패배자 같더라. 왜 서울에 못 사는지 알겠어."


뜬금없이 머리채 잡힌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녀의 하룻밤의 풍진은 유려하게 흘러갔다. 나는 평생 부러워하던 타향살이, 정확히는 농촌살이의 꿈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저도 패배자인데요, 차장님.


차라리 누가 이마에 써붙여줬으면 했다. 패배자 앞에서 패배자 발설 금지.


억지로 사회성 높은 인간인 척하는 기계로 사는 기분은 참 오묘하다. 사회성이 뭔지도 잘 알겠고, 책임감이 뭔지도 잘 아는 나이도 지났는데. 왜 이렇게 괴롭냐.


"어른이 덜 된 거야."


누군가가 말했다. 그럼 난 반문하고 싶은 말들을 꾸역꾸역 눌러 담았다. 그러니까 적당히 윗사람들 눈에 잘 보이고 어련히 취향 맞추고 센스 있게 챙겨주고 떠넘기는 일 입 다물고 해 주고 납득 못해도 시키는 건 우선 하고 보라고.


"근데... 그게 진짜 어른인 건 맞는 거지?"


의견은 자유지만 반문은 자유가 아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의견은 네, 혹은 네네, 였다. 대신 왜 그렇게 해야 하는 거죠? 는 자유가 아니다. 그건 곧 체제에 대한 반란이다. 그냥 여태까지 이렇게 해왔으니까, 란 답이 들려올 거였다.


그리고 차선을 제시하는 즉시, 모든 일이 나의 일이 될 거였다.


역사적으로 반역자들은 실패하면 죽음이었고,


난 죽기 싫은 멸종 위기종인 한국인일 뿐이었다.

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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