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미쳐버려서 비 오는 새벽 도심을 뛰어다녔으면 하고, 또 가끔은 너무 돌아버려서 앞구르기를 하면서 아스팔트를 돌아다니고 싶어졌다. 또 어느 때는 개를 끌고 다니는 주인들의 손에 들린 목줄을 끊어버리고 싶었으며, 디저트 취향조차 1시간 웨이팅을 걸어야 하는 이 거지 같은 인구 밀도에 땅을 갈아엎어 버리길 바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염원해도 날은 밝고 해는 떴다. 밤새 쥐어뜯느라 산발이 된 머리를 빗고 어제 입은 옷 중 그나마 깔끔한 걸로 골라 입고, 매일 매던 가방, 신발, 마스크를 끼고 나면, 또 다른 내가 보였다.
"야, 직장 다니는 사람들 다 그렇게 살아-"
거울을 보는 내가 말했다. 너 어떡하려고 그러냐. 너 그거 병이야. 병원 가봤어? 내가 말하는지 남이 말하는지 종국엔 알 수 없었다. 난 줄창 마스크를 끼고 있었으니까. 또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노력을 하란 말이야. 생각을 바꾸란 말이야.
뇌과학으로 바꾼 세상.
서점 과학 코너를 빙글빙글 돌았다. 이것도 본 거, 이것도 읽은 거, 또 이것도…
허울 좋은 과학인들의 지식 편찬집은 개인의 실험으로 끝이 나고야 만다. 바꿀 수 있다. 생각을 바꾸면 삶이 바뀐다. 뇌에는 신경가소성이란 게 있어서 생각하는 대로 만들어진다. 봐라. 손가락이 잘린 사람은 그 손가락을 쓰던 뇌 영역이 다른 영역으로 사용되고 있다. 뇌는 쓰기 나름이다.
난 이제 유전학을 읽는다.
모든 건 유전이다. 그리고 유전이 발현될 환경이다. 환경이 마련되지 않으면, 그 유전인자가 발현되지 않는다. 개인이 몇십 년 노력하면 DNA가 바뀌어 후대에 물려줄 수 있다. 그걸 후생 유전학이라고 한다.
그럼 내가 지금 하는 노력은 나를 위한 걸까, 후대를 위한 걸까? 난 애도 안 낳을 건데?
난 누굴 위한 노력을 하는거지?
3년 간 읽어오던 책을 던져버렸다. 유일하게 득을 본 건 꾸준한 운동과 침침한 회의실에서 아싸, 지금 야근하면 주말이 더 소중해지겠는걸? 하며 나를 속이는 짓이었다. 끝내 나는 죽어버린다. 그 순간부터 그 시기에 들었던 진실한 생각과 날것의 감정이 모조리 퇴화되어 버리므로.
결국 그렇게 속이 비어버린 기계로 전락한다. 바꿀 수 있다는 희망에서 해방된다. 역설적이게도 희망을 버리면, 자유가 온다.
"먹고 싶은 거 있어?"
"없는데요."
나는 대체로 하지 않는 게 취향이었다. 그러니까 참으로 설명하기 애매한 말이지만, 욕구란 게 거세되어 버려, 디폴트가 없는 삶이었다. 좋아하는 걸 물어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제일 좋아요,라고 답하게 되어버렸다. 아, 이 낭만주의자들에겐 얼마나 안타까운 태도인지. 나는 그들의 비탄을 들으며 책상 가득 쌓인 과자 부스러기들과 다이어트 약을 떠올렸다.
"나나씨 책상은 왜 이렇게 깔끔해?"
왜냐면 저는 하지 않거든요. 어차피 살찔게 걱정되면 먹지 않고, 아플 게 걱정되면 나가질 않고, 피곤할 게 걱정되면 만나질 않거든요. 회의 시간에 말 한마디 잘못 꺼냈다가 비난받을 것 같으면 말을 하지 않아요. 그게 제가 좋아하는 거거든요.
시대를 살아가는 어른이라면 미래를 알고 현재에 비겁해질 줄 알아야 하는 법이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오랜만에 수제버거를 시켰다. 회사였으면 생각도 안 났을 메뉴였다. 먹었으면 도리어 체해서 소화제를 찾았을 테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 쉽고 빠르게 쾌락에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환락.
우린 각자의 편안한 위치에서 음식이 아닌 급진적 쾌락을 섭취 중이었다. 건강한 사회인이란 응당 자신을 저렴하게 굴릴 줄 아는 방법이 있어야 했다. 잔소리를 들으며 어제 먹은 바나나쉐이크나 생각해야 했고, 지친 야근을 하면서 내일 있을 콘서트에 엉덩이를 들썩거려야 했다.
내일은 주말이니까 배가 더부룩해도 상관없었다. 나는 기껍게 햄버거를 입안 가득 베어 물었다.
유일하게 허용된 자기 학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