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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동이즘 Mar 08. 2022

배달원의 등

제주 삼양해안산책로

삼양 해안 산책로에서 가장 좋아하는 길에서 찍은 돌담이 있는 바다뷰


요즘 주로 이용하는 '삼양 산책길'은 왕복 약 8km가량의 코스로

이 동네 이사후 가장 마음에 드는 길이다.


물론 이 코스에서도 싫은 부분이 있다.

우리 동네와 옆 동네 산책로를 이어주는,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두운 고갯길이다.

낮에는 크게 관계 없지만 밤길은 아무래도 조금 무섭다.


밤에 산책을 위해 그 길을 지나야 할 때면,

약 5분 정도를 먼바다 오징어 배들의 빛을 가로등 삼아 달려야 한다.

그렇게 5분의 무서움을 버티고 나면

그에대한 보상으로 예쁜 길을 밟을 수 있다.


그 날도 그렇게 예쁜길을 지나 멀리 반환점을 찍고 다시 돌아오는 길이었다.


무더운 여름밤, 작은 동산까지 넘어야 했기에 온 몸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마지막 1km 정도는 몸을 식힐겸 달리기를 멈추고 걸어서 오는 길이었는데,

저 멀리 오토바이 한대가 멈춰서는 것이 보였다.


대단한 오토바이도 아니었고,

그냥 어느 동네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배달 오토바이였다.

그러나 배달원이 조금 달랐다.

살이 차오른 전형적인 한국형 아저씨 배달원이 아닌

군살하나 없는 날렵한 몸을 가진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적당히 근육이 차오른 등은 외모관리를 하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게했고,

그래서 나이가 많은 사람은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달원은 오토바이에서 황급히 내린뒤 시동을 끄지도 않은채로

심지어 뒤에 달린 배달통의 뚜껑도 열어둔 채,

음식 봉지를 양손에 소중히 쥐고 불켜진 연립주택으로 뛰어 들어갔다.

나는 길에 잠시 멈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20대 시절 참 많은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중엔 당연히 배달 아르바이트도 있었다.

퀵서비스를 한 적도 있고

새벽시장에서 수산물들 도매 배달도 한적이 있고

신장개업한 아구찜집 배달을 한적도 있었다.


음식을 소중히 안고 뛰어들어간 남자의 등에서,

그때의 나를 보았다.


어두컴컴한 집안에 혼자 지내던 시간이 많았다.

어딘가 달려나가고 싶었지만, 그래봐야 시골동네안이었다.

20살이 되자마자 오토바이를 샀던 건 그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 갓 성인이 되어 시작한 아르바이트 수입으로 자동차는 살 수 없었다.


감당할 수 없는 폭력에 그저 숨거나 울고 빌수 밖에 없던 유년기.

아무런 목표를 찾을 수 없어 텅빈 영혼으로 허비한 10대.

치열하게 살았지만, 사람들로 부터 많은 상처만 남은 20대.

30대에 들어서 겨우 원하던 일을 시작해 행복을 찾나 싶었건만 터져버린 공황장애.

돌아보면 힘든 순간들 뿐이었다.


하지만 모든 순간들 사이에 작은 행복들도 스며있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알게 된 친구들, 형, 동생, 누나들, 사장님, 삼촌, 이모들.

만나서 헤어질때까지 장난과 헛소리만 해대던 학창시절 친구들

깊게 사랑하고 찢어질 듯 아팠던 헤어짐들.

사람으로 받았던 상처와 사람으로 채워진 온기들.


그 모든 순간들이 늦은 여름 밤

한 배달원의 등을 통해 스쳐갔다.


내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음식을 배달하기 위해 아파트의 문을 두드리면

안쪽에선 "탁탁탁" 하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문이 열린다.

문 안쪽은 언제나 밝은 주황빛이 가득하다.

거실 안쪽에서 키득대는 웃음 소리가 작게 들려 오기도 하고,

TV소리 혹은 음악소리가 들려온다.

신발장에는 행복을 그리는 많은 신발들이 놓여있다.


그리고 마치 정해진 규칙인 것처럼,

돈을 건네는 사람들은 내 눈을 바라보지 않는다.

음식과 돈을 교환하고 나면 문이 닫힌다.


“쾅”

하는 소리는 문 안쪽의 행복과, 문 밖의 공허를 가르는 소리다.


저녁부터 늦은밤까지,

혹은 늦은밤부터 새벽까지 그 행위를 반복한다.


어스름한 새벽 퇴근후 집에 도착한다.

집안은 늘 컴컴하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사람의 인기척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이불 사이로 몸을 구겨넣고 나면  창밖으로 해가 슬며시 떠오른다.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잠을 청하고 일어나면 다시 배달을 간다.


"비대면 배달은 조금 더 편하려나?"

나는 길에 서서 시동켜진 오토바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열린 문 속 따듯한 주황을 바라보지 않는편이 더 마음 편하지 않을까?

돈없는 꼬마가 창문너머로 바라보는 빵집 풍경,

내 것이 될 수 없는 그 것은 차라리 보지 않는편이 낫지 않을까?


그럴리 없을 것이다.


차가운 철문 너머로도 안쪽의 온기는 느낄 수 있다.

눈으로 확인하지 못할 뿐,

온기를 지닌 공간의 힘은

보지 않는다하여 느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때보다 나아진 것에 위안하며 살면 되는 것일까?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것으로 위안하면 되는 것일까?


그러지 않기위해 제주도로 내려왔다.

그러지 않기위해 명상을 하고 산책을 한다.

그러지 않기위해 돈을 많이 주는 일보다, 재밌어 보이는 일을 택한다.


오늘은 꽉 막혀 떠오르지 않는 아이디어 때문에 하루를 흘러보냈다.

조금 게으른 하루가 아니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을러도 괜찮다.

하지만 즐거운 게으름이어야 한다.

나태해도 괜찮다.

그러나 즐거운 나태함이어야 했다.


그 남자의 등으로 떠올린 과거의 나에게 미안해지지 말자.

즐거운 하루로 채워가자! 라고 생각했다.


즐거움이 중요하다.

즐거움으로 열심히 살아야 겠다고 생각하는 늦은밤 산책이었다.



-배달원의 등.


삼양 해안 산책로에 있는 작은 카페. 왼쪽에 보이는 옥상으로 올라가 바다를 보며 커피를 마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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