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결혼에 사랑 타령 좀 하면 어때서
삼십 대 후반에 접어들어 결혼이 무척이나 하고 싶었던 때에 결혼에 대한 나만의 작은 바람이 있었다.
뭘 잘 모르는 10,20대도 아니고 주변에 한번 다녀온 지인이 몇몇 있었으며 남편을 죽일 기세로 저주하는 이들도 많았어서 그럴싸한 스펙을 가진 백마 탄 왕자님은 얼어 죽을 꿈에도 바라지 않았다.
내가 바랬던 유일한 것은 오글거리지만, 어쩌면 결혼의 당연한 전제인 ‘사랑‘이었다.
목이 늘어지고 색이 바랜 닳고 닳은 티셔츠를 입고도 서로의 모습이 귀엽다며 어루만져 주고, 여기저기 험한 세상에 치일 때면 따뜻한 품을 내어주며 그 누가 뭐래도 서로의 단단한 뿌리로 얽혀 신뢰하는 그런 관계…는 너무 판타지인가? 누군가 말하긴 했었다. 말도 안 되는 사랑 타령을 하느니 눈먼 백마 탄 왕자를 찾는 게 훨씬 빠르겠다고…
아무튼 간에 결혼을 해보겠다고 결심이 섰을 때 항상 머릿속으로 되새겼던 말이 있다. “결혼으로 장사하지 말자. 계산기 두드리지 말자”였다. 공황장애 진단을 받고 방구석을 뒹굴거리던 시절, 우연히 알게 된 법륜스님의 유튜브에서 자주 해주시던 말씀이었다.
삼십 대 중반이 넘어가니 연애 시장은 물론이거니와 결혼 시장은 실전 그 자체였다. 마치 회사 밖에서 보는 제2의 압박 면접 같다고 해야 할까?
스스로 얼마나 경제력을 쌓아왔고 고스펙을 위해 노력했으며 퇴근 후 여유시간 따위 없이 몸관리와 자기 계발을 열심히 했는지에 따라 선택당할 수 있었다. 부모님 찬스는 옵션이 아닌 필수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자신이 생각하는 연애나 결혼의 가치관보다는 조금 더 자신을 포장하고 꾸미기에 정신없어 보이는, 겉은 그저 번질번질한 남자들에겐 그다지 흥미가 가지 않았다. 삶을 어떤 태도로 살고자 하는지 보다 차고 있는 시계나 소유 중인 차에 대해 열심히 말하는 남자는 더더욱…
몇 번의 소개팅을 날려 보내 던 어느 날 현재 쌍둥이 육아를 같이 하고 있는 남편을 소개받았다.
첫 만남이 굉장히 신선해서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만난 지 10분 정도 지났으려나? 다짜고짜 자기가 뭐 하는 사람인지 알고 나왔냐며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리곤 이어서 당당하게 내뱉은 말은
“저 박봉이에요. 돈 많이 못 벌어요.”
돈 잘 못 버는 걸 대놓고 얘기하는 남자는 네가 처음이야. 근데 웃긴 게 번쩍이는 시계나 외제차를 자랑하기 바쁜 남자들보다 꽤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박봉이라는 사람이 대체 이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지? 알 수 없는 흥미가 스멀스멀 올라오던 터라 신이 나서 떠드는 그를 계속 지켜봤다. 계속해서 내 인상이 좋다는 둥 먹고 싶은 메뉴가 뭐냐는 둥 똑같은 내용의 말과 질문을 반복하면서 그는 밝게 웃고 있었다.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던가? 아무래도 나이가 있다 보니 결혼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나도 모르게 속물근성이 툭툭 튀어나와 이것저것 질문세례를 던지고 말았다. 무덤덤하게 질문에 답하는 그를 보며 나한텐 궁금한 거 없냐고 시큰둥하게 물어보니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 참을 뜸 들이다 입을 열었다.
“나를 얼마큼 좋아해?”
낼모레 마흔을 앞둔 남자가 그것도 결혼 전제로 현실적인 질문을 쏟아내는 여자 앞에서 어수룩하게 내뱉은 말 한마디였다. 생각지도 못한 순수한 질문에 난 한방 먹은 듯 머리가 띠잉… 아니 시야가 하얗게 흐려졌다. 그때 딱 떠올랐던 건 ‘난 이 사람보다 몇 수 아래구나 ‘… 고작 연봉이나 통장 잔고를 답할 줄 알았는데 정신이 확 들었다.
그의 밝지만 어수룩하면서도 순수함에 끌렸던가? 박봉이라는 말로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되었다가 조금씩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던 때, 내 상태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놔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지금 되새겨 보면 별 거 아니지만 당시에는 공황장애라고 고백하는 그 말 한마디를 내뱉는 게 정말 힘겨웠었다. 부모님은 당연히 숨기라고 했었고 난 뭐 거의 헤어지는 분위기를 풍기며 기어가는 개미처럼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공황장애 커밍아웃을 했다. 평소 같지 않게 떨리는 목소리와 한숨, 대화의 공백이 길어지는 분위기에 그도 뭔가 휴대폰 너머로 긴장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거의 울먹이다시피 말을 끝내자, 어린아이의 귀여운 행동을 본 것처럼 말했다.
“그래서? 뭐 헤어지기라도 하자는 거야?”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예상 답변은 빗나갔다. 전화통화 하면서 굽어졌던 어깨와 허리를 좀 피고 통화에 집중했다. 그는 한 번도 나를 만나는 동안 자신이 감당 못 할 만큼 이상한 점이 없었고 설령 그런 게 있었다고 해도 그건 자기가 판단할 점이라고 단단한 어조로 말했다. 좋았다. 행복했다. 내가 뭘 가졌는지가 아닌 내가 꼭꼭 숨기고 싶었던 취약함을 펼쳤을 때 별 거 아니라고 덮어주는 다정한 목소리가 따뜻했다. 그 뒤론 순간순간 찾아오는 공황도 두렵지 않았고 뭐라도 한 걸음씩 새로 시작할 용기가 꿈틀댔다.
남편을 만나기 전까진 소위 잘 나가는 시기에 좋은 인연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했었다. 더 열심히 다이어트를 해서 외모를 가꾸고 스펙을 쌓아서 높은 연봉으로 몸값을 올리는 게 좋은 인연을 만나는 빠른 길이라고 단정 지었다. 인간은 어쩔 수없이 상대를 통해 실 보단 득에 집중할 수밖에 없으니… 그것도 결혼 앞에선.
하지만 결혼 적령기가 한 참 지난, 직장도 안 다니는 노처녀에 백수, 거기에 공황장애까지 겪고 있는 이상한 여자가 아닌 ‘나‘라는 사람 자체를 봐준 그가 좋았다. 이건 부모에게도 받아보지 못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따스한 감촉 같은 충만함이었다.
결혼 후 달콤한 신혼을 지나 쌍둥이 육아로 치이고 있는 요즈음이지만 내 작은 바람을 상상이 아닌 현실로 이뤄낼 수 있었던 남편과의 인연에 감사하며
그래도 결혼은 사랑으로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속으로 웃으며 곱씹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