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갉아먹는 이들과 더 이상 함께 하고 싶지 않아
지금의 남편과 연애를… 아니 결혼을 결심하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 그와 함께 있는 느낌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숨 통이 트인다고 해야 하나?
40년 가까이 티끌만 한 일조차 끊임없이 간섭하는 부모님으로부터 지치다 지쳐 결국 나가떨어진 상태였고 공황에 치어 마음 둘 곳 없던 시절, 감사하게도 남편이 나타나 주었다.
남편은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사소한 것 어느 하나도 간섭하거나 요구하는 게 없다. 오랜 시간 부모의 통제 속에서 자라 온 나는 그에게 허락을 구하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었는데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말은 항상 “너 편한 대로 해”이다.
대학교 입학식 날이었던가?
예체능 전공자, 특히 방송연예과 학생들이 많은 여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딱 봐도 늘씬하고 예쁜 동기들이 많이 보였다. 입학식이 끝나고 뭔지 모를 뿌듯한 마음에 엄마에게 웃으며 뛰어갔는데 뜻밖의 말을 내 귀에 속삭였다.
“네가 여기서 제일 뚱뚱해. 빨리 살 빼자”
초등학교 때부터 과체중과 비만 그 어느 사이를 왔다 갔다 했었고, 출산 후에도 비만의 팔자에서 벗어날 수 없는 몸이었다. 쌍둥이 출산 후,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 몸매를 평가했다. 고생했다. 늦은 나이에 아이 낳느라 얼마나 힘들었겠냐가 상식적으로 먼저 아닌가?
“출산하고 너 살이 너무 쪘어. 엄마니까 이렇게 솔직하게 말해주지 누가 말해주냐?”
응 고마워 엄마.
덕분에 난 초등학교 때부터 먹는 것에 자유롭지 못하고 심리적으로 통제받았으며 내 모습을 함부로 평가받을까 봐 많은 사람들 앞에 잘 서지 못했다. 별 거 아닌 거에도 상대방의 허락을 구하는 쭈글쭈글한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스스로가 한심해 보였다.
공황장애를 심하게 겪어 매일 매시간 퇴사를 고민하던 어느 날, 그래도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했던 엄마에게 전화해서 어린아이처럼 한 껏 투정을 부렸다.
“엄마 나 너어어어어무 힘든데… 회사… 그만… 두면… 안될까?”
하지만 엄마 앞에서는 얄짤없지! 방송인 김ㅇ라가 울고 갈 만큼 냉혹한 그녀의 한마디가 귀에 꽂혔다.
“야! 너 낼모레 마흔에 나이도 많은데 노처녀에 백수까지 되려고? 좀 더 버텨봐!!!”
지금 생각해 보면 뭐 그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거니 넘길 수 있지만 당시에는 그 말을 듣자마자 눈 가득 눈물이 고였고 우는 소리를 들키기 싫어 급하게 통화를 끝냈다. 아마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듣고 싶었던 말이 있었던 것 같다.
“너 그동안 애 많이 썼어. 일단 좀 쉬자”
엄마 못지않게 아빠도 자식에게 필터링 없이 막말하는 건 절대 지지 않는다. 역시나 부부는 끼리끼리가 과학이다.
다 큰 자식의 몸매 평가는 기본이고, 먹는 것에 대한 통제는 옵션, 내가 뭘 하고 싶은지는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으면서 다니는 회사와 이직에 대해서는 왈가왈부,
평소 입고 다니는 옷과 헤어스타일에 대한 참견, 심지어 우리 아가들이 먹는 분유까지 이거 먹여라 저거 먹여라 간섭해야 하는 게 당연한 사람이다.
공황증상으로 고생하던 시기, 주말 점심이나 얻어먹을까 하고 부모님 집을 방문했을 때,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지 내가 왜 또 여기를 제 발로 찾아왔을까 싶었다.
내 몸의 이상증세를 알아챈 아빠는 나의 게으름과 운동부족을 꼬집으며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평소에 항상 느끼는 거지만 아빠는 정말 듣는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하는 특기가 있다. 이 특기를 살려 직업을 선택했으면 정말 성공하고도 남았을 터인데 안타깝다.
아빠의 말에 따르면, 나는 그저 코로나 시대에 재택근무로 게을러터져 운동도 안 하고 집구석에 틀어박힌 체력 많이 딸려하는 노처녀라는 게 한 줄 요약이었다.
모두 잠든 어두운 새벽, 고요한 밤공기 사이로 스멀스멀 또다시 공황증상이 몰려온다.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부모님 집과의 거리는 차를 타고 20-30분. 하지만 난 극한 공황에도 절대 연락하지 않는다.
우연히 유튜브에서 본 심리학 영상이 기억에 남는다. 사람을 가장 빠르게 무너트리는 방법은 사소한 것까지 끊임없이 지적하는 것이라고.
조언이라고 던진 말 한마디가 비판으로 변질되어 점점 자신감을 갉아먹는다고 한다. 영리한 아이라도 끊임없이 받는 지적에 점차 무기력해지고 난 뭘 해도 안 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판단하게 된다는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인생의 암흑기였던 공황 시절을 비롯하여 그동안 수많이 겪어왔던 상처 마일리지 덕분에 어렵지 않게 부모님과의 정을 떼버릴 수 있었다. 어느새 자연스럽게 자식 된 도리만 하고 살자며 어렵지 않게 마음의 정리가 돼버렸다.
자식은 어쩔 수 없나 보다. 받은 것보다 서운했던 기억이 몇 백배 더 크다. 그게 힘들었던 시기라면 더더욱.
공황장애 걸린 백수 노처녀 시절, 내 유일한 자존감 지킴이는 당시 남자친구, 현 남편이었다. 요즈음 돌을 앞두고 있는 쌍둥이 육아로 심신이 매우 지쳐있어 서로를 돌보지 못했는데 글을 쓰는 이 순간 새삼 남편의 존재가 고맙다.
이제 와서 고백하지만,
단 두 번째 만남에서 이미 이 남자와 연애를 상상했다. 이유는 생각지도 못한 말 한마디였다.
이제는 백수가 되었으니 남는 게 시간뿐이라 연애나 실컷 해보자라고 소리쳤지만 솔직한 심정으론 공황장애 걸린 백수 노처녀를 누가 만나줄까?라는 생각만 꽉 차있어 자존감이 바닥이었다. 요즈음 같이 외모, 스펙 뭐 하나 치우치는 것 없이 치열하게 준비해서 연애고 결혼 시장이고 뛰어드는 마당에 이제 곧 밥줄 끊길 위기에 처한, 심지어 나이도 많고 아프기까지 한 나를 누가 봐줄 것인가…
남편과 두 번째 소개팅날이었던가
연애를 너무나 하고 싶었던 솔직한 심경과 달리 나도 모르게 이 남자를 계속 밀어내고 있었다.
자신이 없었고, 그때 당시에는 무슨 공황장애가 죄인인 것 마냥 쭈구리 마인드를 장착하고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 것 같은데 계속 연애 거절 의사를 풀풀 풍겼다.
“저 이제 백수고요. 한 동안 돈 못 벌고 쉴 거고 여행 다닐 거고… 제주도 가서 오래 있을 거예요…”
아쉬웠다. 이 타이밍에 나에게 호감을 보여줄 남자가 대체 어디 있겠냐 말이다. 하늘에서 조상님이 보내주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내가 예상했던 결과는 아.. 네… 그렇군요 처럼 뜨뜻미지근한 답변과 함께 연락두절이거나 훈장님 마인드로 그 나이에 돈 못 벌고 쉬는 게 밀이 되냐 등등 잔소리 시전을 예상했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왔던 말은
“제주도요?? 얼마나 오래가 있을 건데요?…그럼 날 만나주기는 하려나???”
오잉?!!!!! 뭐야 뭐야 나한테 맘 있는 거 맞는 거지? 진짜 오랜만에 마음의 파도가 넘실대다 잔잔해지다 쿵쾅대다 설렘으로 충만해졌다.
아직 공황장애 커밍아웃을 하기 전이었지만 왠지 이 남자라면 나의 약점까지 품어줄 것 같은 기대를 하게 된 밤이었다. 나중에 뒤에서 얘기를 풀어나가겠지만 공황장애를 고백한 날에도 그는 생각지 못한 무덤덤한 말로 나를 안심시켜 주었고 무엇보다 나를 선택함에 있어 자신이 옳다는 얘기를 많이 해주었다.
세상 누구보다도 가깝고 기댈 수 있다고 믿었던 내 안의 부모라는 큰 성은 서서히 무너지고 진짜 내 가족을 만들 수 있을 거란 희망 한 꼬집을 가졌던 날이었다.
부모님이 서운해해도 어쩔 수 없다. 딸년 키워 받자 소용없다는 말을 들어도 상관없다.
모두 순리대로 흘러가는 것이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