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혼주의의 마음을 흔들었던 공황장애 녀석
빈번한 공황증상으로
몸과 마음이 무너져 내렸던 시절.
내가 가장 버티기 힘들었던 순간은
지하철만 타면 무턱대고 찾아오는 공황도 아니었고, 중요한 회의 발표 직전에 지나친 긴장감이 만들어낸 공황증상도 아니었다.
바로 나 홀로 텅 빈 집 안에서 오롯이 버터야 하는 새벽에 찾아오는 공황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고독했다. 새벽에 부모님께 연락하는 것도 민폐인 것 같고 당시 남자친구도 없었으며 연락하면 달려와 줄 친한 지인도 없었다. 가장 두려웠던 건 한두 번이었지만 내 의지와 달리 베란다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스쳐 지나갈 때였다.
기댈 곳은 집 근처 응급실뿐.
당시에는 아직 공황장애 진단을 받기 전이었고, 공황장애 진단을 받는 순간 스스로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인식될까 봐 두려웠다. 아직도 뼈저리게 후회하는 한 가지가 바로 그 당시 정신과 문을 두드리지 않았던 내 과거이다.
잠옷 바람에 외투를 걸친 채 정신을 꽉 붙잡고 이를 악물며 터덜터덜 응급실로 향했다. 몇 개의 기본 검사를 마친 뒤 수액을 맞으며 베드에 누워있었다. 고단했는지 살짝 선잠이 들었다가 개슴츠레 눈을 떴다. 잘생긴 의사가 시건방진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역시 잘생긴 사람을 보면 아파도 힘이 솟아나는 법이지… 요즘 의사는 얼굴 보고 뽑나?‘
잠결에 이상한 생각을 하던 찰나 의사의 앙칼진 목소리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병원까지 걸어서 오셨죠?…”
아니 이게 무슨 말인가? 그럼 걸어오지 뭐!!! 아프다는 사람 앞에 두고 이게 뭔 뚱딴지같은 소리람?
“걸어오셨으면 응급 아니고, 검사결과 아무 이상도 없습니다. 처방약도 없고. 이만 가보셔도 됩니다.”
녜녜 위대하신 의사 선생님 꾀병으로 베드 한 칸 차지하고 있는 이 죄인은 이만 물러가겠사옵나이다.
공황증상을 한번쯤 겪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신기하게도 몇 십분 있다 보면 거짓말처럼 다시 멀쩡해진다. 의사와 면담을 마치고 비싼 응급실 병원비, 수액으로 본전은 빼먹어야지 했는데, 순간 와다다다 교통사고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베드가 없어 죽겠는데 저 나일론 환자는 왜 아직도 안 가고 버티는 거야라고 눈으로 욕하고 있는 듯한 간호사들의 시선에 주눅 들었다. 물론 소심한 나 혼자의 착각이었다.
“저… 수… 수액 좀 빼주세요…”
응급실을 나와 차가운 새벽 공기에 이제 좀 정신이 드나 싶어 입구 유리문으로 내 모습을 힐끗 봤다.
헝클어진 머리는 물론이거니와 남 보여주기 쪽팔린 다 낡은 잠옷에 슬리퍼.
외투 덕분에 그나마 누추한 행색을 좀 가렸다.
그때였나? 우주의 기운인지 신의 메시지인지 새벽의 몽롱한 정신 때문인지 내 머릿속에 강렬한 목소리 하나가 들렸다.
‘결혼을 해야겠어… 결혼… 결혼… 결혼을…‘
공황장애를 겪으면서 내가 많이 외로웠나 싶었다. 심각한 외로움은 영혼을 좀 먹는다고 했었나…
이전에는 청첩장을 받으면 겉으론 무한 축하를 날렸으나 속으론 자유롭게 혼자 살지 왜 고생길로 굴러들어가는 거야 대체? 라며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잦은 공황증상에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 지쳐버렸던 나는 그 누구보다도 내 옆에 있어 줄 짝꿍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어느새 마음속 깊이 자리 잡았다.
그날부터 미친 듯이 지인의 지인까지 소개팅을 부탁했고, 인연은 가까이에 있다는 옛말이 틀리지 않았는지 친동생의 지인에게서 현재 같이 살고 있는 남편을 소개받았다. 이 글을 빌려 머나먼 타국에서도 언니의 결혼을 위해 애써준 동생님께 늦게나마 영광을 돌린다.
“엄마. 저어어어얼대 기대하지 마! 그냥 밥이나 먹으러 가는 거야!”
누가 봐도 소개팅 나가는 여자여자한 원피스를 골라 입고 평소 하지도 않는 화장에 최선을 다하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휴대폰 너머로 내뱉었다.
내일이면 10년 넘게 한 번도 쉬어본 적 없는 내가 공황장애로 회사를 관두는데 이 와중에 남자를 만나겠다고 실컷 꾸민 모습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더 어이가 없었던 건 회사 출근할 때 지하철을 못 타서 퇴사를 하는데, 왠 걸 이번 소개팅에 나가는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오랜만에 맘 편히 지하철을 타고 만남의 장소로 향했다.
미래에 대한 복선이었을까?
오랜만에 느껴보는 편안함에 소개팅 상대(현 남편)가 10분을 늦는다는 연락이 왔음에도 전혀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콧노래를 부르며 카페 안에서 소개팅하는 다른 커플을 관찰하고 여유 있게 창밖도 바라보았다.
잠시 후, 헐래 벌떡 소개팅 상대가 뛰어왔고 난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틀렸구나 라는 성급한 생각과 함께 맛있는 밥이나 먹고 가야지라고 머릿속에 메뉴를 떠올렸다.
만난 지 10분 만에 내 인상에 대해 칭찬을 내뱉었던 그는 누가 봐도 나를 꾀나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키 크고 덩치 큰 남자가 이상형이었던 난 키차이도 별로 안 나고 내 몸무게와 차이는 더더욱 안나 보이는 이 남자가 그다지 끌리진 않았다. 아직도 덜 아프고 덜 외로웠던게지…
맛있는 밥을 사겠다며 한 껏 들떠 보였던 그의 모습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식사를 하며 더듬더듬 이어나갔던 대화에서 MBTI와 인상 깊게 읽었던 책으로 아주 살짝궁 그에게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MBTI가 같고 최근에 인상 깊게 읽었던 책까지 똑같았다. 난 속으로 또 엉뚱하게 동생이 미리 내 정보를 흘렸나 싶을 만큼 신기했다.
초 여름밤공기는 따뜻함과 선선함 그 사이 딱 적당한 온도였고 소개팅 장소는 마침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 근처였다. 소화도 시킬 겸 인사동을 한 바퀴 돌았고 어차피 잘 안될 것 같은 마음에 내숭 따윈 집어치우고 옛 고등학교 추억들을 쫑알쫑알 내뱉으며 떠들었다.
오랜만에 신은 구두 덕분에 발목이 나가기 직전이라 서둘러 집에 가겠다는 의지를 내뿜었고, 버스에 서올라타던 순간
“연락해도 되죠?”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내 몸무게와 별 차이 안 날 것 같은이 호리호리한 남자와의 연애는 감히 상상도 못 했고 결혼은 더더욱 다른 사람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남자와 지금, 이제 곧 돌을 맞이하는 귀여운 쌍둥이들 육아로 고군분투 중이다.
인생사 오래 살고 볼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