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신하던 것을 의심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어느덧 확신보다는 여백이 많은 사람이 되었다. 아직 불씨가 남아있긴 하지만, 세상을 발아래 두고 싶었던 허무맹랑한 패기는 한풀 꺾였다. 그보다는 물렁해진 나의 눈앞에 세상을 두고 넓어지는 반경을 관측하는 데에 흥미가 생겼다. 어린 나에게는 평생에 걸쳐 관철하려던 신념이 있었다. ‘미래의 내가 행복해진다면, 지금의 나는 고통받아도 괜찮다.’ 그건 일종의 자기희생 같았지만, 사실은 오만이었다. 그때의 나도, 지금의 나도, 모두 현재를 살아내는 나였는데. 그걸 이제서야 안다.
당장 3달 전의 나도 너무 어렸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는 왜 몰랐을까. 찰나의 시간을 지나며 내게 무슨 변화가 생긴 걸까. 그런데 학창 시절 친구들은 언제 보아도 서로 예전 그대로라고 말한다. 신기하다. 나는 변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들은 나를 여전하다고 말한다. 그 말이 이상하게 위로가 된다. 나는 늘 변하려고 했다. 미성숙을 고치고, 성숙이 되어야 한다고. 그게 옳다고 믿었다. 그런데 나의 변함없음을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럼 나는, 변한 내가 좋은 걸까 아니면 변하지 않은 내가 좋은 걸까. 혼란스럽다.
오래된 사진 속 나는 예쁘다. 정말 예쁘다. 무지로 반짝이던 얼굴이다. 예상 밖으로 그 시절의 글을 읽으면 생각보다 속이 깊고 단단하다. 더는 과거의 나를 ‘부족’일뿐이었다고 치부하지 않기로 한다. 지금도 미래의 내가 지금보다 나은 사람일 거라 믿지만, 그 믿음이 꼭 어렸던 나를 부정해야만 성립하는 건 아니니까. 나이는 쌓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겹겹이 만들어주는 일 같다. 그 안에는 미성숙도, 성숙도, 변화도, 불변도 함께 산다.
불사가 아닌 삶이 애틋하다. 미성숙이 성숙을 품고, 성숙이 미성숙을 그리워하는 시간을 살아간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자라고 있다. 자라서 멀어지는 게 아니라, 자라서 가까워지는 쪽으로. 그게 나의 나이, 나의 시간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