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

by 우동

장맛비의 냄새가 짙고, 흐렸던 지난 여름날이 떠오른다. 그날따라 굵은 비가 내리는데도 마음만은 뽀송했다. 점심을 먹고 낮잠을 청하려 책상에 엎드렸다. 반쯤 감긴 눈으로 나른해져가는데 창밖의 빗소리가 귓가에 나직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몽롱한 이야기를 그리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는 오후, 수업이 끝나고 소녀를 따라 소년이 걷는다. 우산이 없는 소녀는 우뚝 서서 우산 쓴 아이들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가 그녀에게 우산을 건네주었다. 시간이 흘러, 소년은 언제든 그때로 돌아갈 수 있는 기억을 간직한 어른이 되었다. 땅바닥의 개미 하나가 기어다니던 것도 기억을 한다. 소년에게 그날의 추억은 이렇게 기억된다.


‘우리가 무대에 서있었다. 우리는 주인공이었다. 내가 그녀를 좋아했을 뿐이었다. 감정은 퇴적되고 세월은 흐르지만, 나는 여전히 그녀에게 고맙다. 나는 여전히 우산에게 고맙다.’


소년은 사랑을 말하지 않아도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작고 흔한 우산이라는 사물은 커다란 감정의 상징이 되었다. 누군가를 위해 내민 손, 잠시라도 함께였던 그 거리, 그 순간의 따뜻함. 사랑이든 호의든, 결국 사람은 그런 기억을 발판 삼아 자란다. 비가 오는 날이면, 소년은 우산보다 마음을 먼저 펼칠 것이다. 젖지 않으려는 게 아니라, 다시 한번 누군가를 향해 다가가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어떤 사랑을 하든, 그 결실이 어떠하든, 모든 사랑은 따뜻한 기억으로 남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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