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블랙스완>
영화 <블랙 스완>은 완벽한 백조 연기를 선보이는 발레리나 ‘니나’가 흑조가 되어가는 과정을 보인다. 영화 속에서 니나는 두 가지 욕망을 가진다. 하나는 백조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고, 다른 하나는 흑조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다. 처음엔 백조에 머물렀던 니나는 점차 잠재되어 있던 자신의 본성을 깨워 완벽한 흑조로 거듭난다.
백조가 되고자 하는 욕망
니나의 첫 번째 욕망은 '백조'다. 니나는 오랜 시간 자신을 발레단 프리마돈나인 ‘백조의 호수’의 백조 역에 맞춰왔다. 니나는 연약하고 순수한 백조처럼 보이지만, 이는 본모습이 아니다. 니나는 백조가 되고자 자신을 억압하고 있다.
니나는 담배를 피우고, 성경험도 있는 성인이다. 단장 ‘토마스’에게 배역을 부탁하러 갈 때는 짙은 화장을 하고 가는 영악한 모습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한다. 이러한 니나의 욕망에는 조력자가 있다. 니나의 엄마 ‘에리카’다. 에리카는 임신으로 인해 발레를 그만뒀기에 니나의 성적 성숙을 제한한다. 다 큰 성인인 니나의 방을 인형들로 꾸미고, 니나가 잠들기 전엔 오르골을 틀어준다. 이성과 만남을 제한하고, 밤 외출을 금지하기도 한다.
에리카는 딸에게 헌신하면서도 딸을 질투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니나가 스완퀸 역을 따내자 발레리나에게 체중 관리가 중요한 걸 알면서도 커다란 케이크를 사 오는 모습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니나가 케이크 먹기를 거부하자 에리카는 케이크를 쓰레기통에 버리려는 감정적이고 강압적인 모습을 보인다. 니나의 사진을 벽에 한가득 붙여 놓고 기괴한 모습의 여인을 그리며 우는 편집증적인 모습까지 보인다.
한때, 에리카는 니나의 롤모델이었을 것이다. 에리카는 발레리나로서 이루지 못했던 자신의 꿈을 딸을 통해 해소하려 니나에게 발레를 시켰다. 그러나 니나가 성장하고 에리카의 실력을 추월하기 시작하면서 에리카는 롤모델로서의 자격을 상실한다. 에리카 역시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니나에게 헌신과 질투라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니나는 엄마의 억압을 원하지 않고, 엄마가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방법도 알며, 엄마가 물건을 어디에 숨길 지도 알만큼 영리하다. 하지만 니나는 이러한 엄마의 억압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않는다. 앞선 상황에서도 니나는 그저 엄마를 달래고 먹기 싫은 케이크를 순순히 먹는다. 이러한 모습은 연약하고 순수한 백조가 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인 것이다.
현재 니나의 롤모델은 前 프리마돈나였던 ‘베스’다. 니나는 베스를 동경하기에, 전성기가 지난 베스를 조롱하는 동료들에 맞서 적극적으로 베스를 옹호한다. 그러나 니나는 동경에서 끝나지 않고 모방의 단계로 나아간다. 베스의 물건을 훔치고, 공연 전이나 단장을 만나러 가기 전 같은 중요한 때 이를 사용하며 마음을 다잡는다.
결국, 니나는 베스를 밀어내고 새로운 스완퀸이 된다. 니나에게 스완퀸의 자리와 단장 토마스의 관심을 모두 뺏긴 베스는 스스로 달리는 차에 뛰어들어 다리를 잃는다. 자신으로 인한 우상의 몰락을 목격한 니나는 자신 역시 베스처럼 누군가에 의해 밀려나게 될까 봐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이는 ‘스완퀸’ 자리에 강한 집착으로 이어진다.
흑조가 되고자 하는 욕망
엄마의 억압을 참았고, 착하게 행동하며 본성을 억눌렀다. 그 결과, 니나는 연약하고 순수하며 우아한 백조가 되었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었다. 백조뿐만 아니라 흑조까지 소화해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이제껏 니나가 기울여온 백조가 되기 위한 노력이 그녀를 제한하는 장벽으로 변했다.
단장 토마스는 니나의 본모습을 가장 먼저 꿰뚫어 본다. 니나에게 흑조의 잠재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니나를 스완퀸으로 뽑았지만, 니나는 아직 흑조로 깨어나지 못했다. 토마스는 그런 니나를 다그치며 점점 궁지로 몰아간다.
이때 니나에게 가장 큰 위협으로 다가오는 존재는 신입 무용수 ‘릴리’다. 릴리는 기술적으로 완벽하진 않지만 특유의 자유분방함과 관능을 가졌다. 서로에게 익숙해진 발레단 단원들 가운데서 이질적인 존재로 존재감을 드러내며, 탁월한 흑조로 인정받는다. 토마스에게서 ‘억제된 완벽한 춤’이 아닌 ‘자신을 방출하는 춤’을 추라는 요구를 받은 니나에게, 릴리는 자신의 배역을 노리는 가장 큰 위협 대상이자 롤모델이다.
릴리는 니나와의 경쟁자이면서도, 니나가 흑조로 각성하도록 돕는 조력자의 역할을 한다. 릴리는 니나가 억압하고 있던 본성을 드러내도록 이끈다. 니나는 릴리를 따라 엄마에게 반항하고, 클럽에서 약을 하며 남자들과 어울리는 일탈을 경험한다. 릴리와 섹스하는 꿈까지 꾸면서 니나는 성적 욕망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그동안 니나의 주변엔 남성이 부재했다. 가족 관계는 엄마와 니나 둘 뿐이고, 엄마로 인해 니나의 이성 관계는 제한됐다. 동료 역시 대부분 여성이고 극히 적은 발레리노와 단장만이 니나 주변의 남성이다. 그러나 이들은 니나를 매력적인 여성으로 여기지 않는다. 단장 토마스는 니나를 집으로 불러들여 유혹하는 듯 하지만, 관계를 맺지는 않는다. “단장이 널 미성숙한 어린애라고 하던데”라는 베스의 대사에서 알 수 있듯, 토마스는 니나를 성숙한 여성으로 여기지 않는다. 반면, 토마스와 동료 발레리노들은 니나보다는 릴리와 있을 때 더 친밀해 보인다. 니나와 릴리가 함께 식사하는 장면에서도 남자들은 릴리에게만 호감을 표하고, 릴리는 이와 같은 관심을 익숙하게 받으며 니나보다 우월성을 보인다. 니나는 토마스나 자신의 상대역과 관계를 맺는 릴리의 환영을 보며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넣기 시작한다.
흑조에 대한 니나의 집착이 심해지는 과정에서, 니나는 거울에서 또 다른 자신을 마주하기 시작한다. 거울 속 니나는 현실의 니나를 흉내 내지만, 가끔씩 니나를 비웃듯 고개를 돌려 상처를 긁는다. 니나의 날개뼈 위 상처는 니나의 억압된 본성이 터져 나오는 증거다. 니나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무의식 중에 상처를 긁어 피를 흘린다. 엄마 에리카는 니나가 상처를 긁는 행위를 억지로 막고, 상처를 화장으로 가리려고만 한다. 하지만 결국 상처는 아물지 않고, 상처 위로 흑조의 날개가 돋아나며 니나는 완전하게 각성한다.
거울은 그녀의 이성과 본성을 가르는 경계다. 영화 말미에 니나는 릴리와 몸싸움을 벌이다가 거울을 부순다. 결국 자신의 경쟁자인 릴리를 죽이고, 이성과 본성의 경계를 허문다. 이후, 니나는 자신이 죽인 것이 릴리가 아닌 ‘백조’로서의 자신임을 깨닫고, 몸속에 파묻혀있던 마지막 거울 한 조각까지 빼내며 완전한 흑조로 태어난다.
완전한 흑조로 각성한 그녀는 경쟁자였던 릴리를 압도한다. 성공적인 공연을 마친 뒤, 니나는 토마스에게 키스를 퍼붓는다. 토마스는 당황하면서도 니나가 본인에게 키스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 내내 니나에게 무관심했던 발레리노들 역시 니나에게 매력을 느끼며, 니나는 매력적인 이성으로 거듭난다. 관객과 동료들은 니나에게 환호를 보내고, 릴리는 니나의 대기실에 직접 들러 니나의 우월성을 인정한다. 결국 니나는 발레리나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 자신의 롤모델이었던 엄마, 베스, 릴리와의 경쟁에서 차례로 승리를 거머쥔다.
니나의 욕망은 결국 니나를 파멸로 이끌었다. 그녀는 더 이상 백조에 연연하지 않는다. 백조 연기를 하면서도 눈은 흑조처럼 붉게 물들어 있다. 심지어 본 공연의 백조 파트에서 큰 실수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그녀는 마지막 순간 ‘I was perfect’라고 말하며 자신의 연기가 완벽했음을 주장한다. 니나의 표정은 누구보다도 후련하다. 관람자에게는 다소 호러스러운 엔딩이 니나에겐 더 없는 해피엔딩이라는 게 아이러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