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살인의 추억> 재개봉
웹툰 작가 ‘기안 84’는 자신을 "논뚜렁이 아름답고 여자들이 실종되는 도시, 화성시 기안동에 살던 84년생”이라 소개했었다. 화성 연쇄살인사건은 참극이다. 피해자가 있고 그들의 남은 가족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사건과 관련이 없는 누군가에겐 자기소개에 양념을 쳐줄 가십거리로 소비될 뿐이었다.
이 때문에 <살인의 추억> 보기를 망설였다. 영화화된다는 것은 상업성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누군가의 참극을 나의 흥미를 위해 소비해도 될까라는 죄책감이 있었다. 나는 피해자가 아니기에, 나와 피해자를 분리하고 관망할 수밖에 없다는 점 역시 큰 죄책감을 안겼다. 피해자의 몸에서 나온 복숭아 조각들을 보며 피해자가 느꼈을 고통보다는 극도의 불쾌함을 먼저 느낀다는 점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가장 불쾌했던 점은 영화가 묘사한 대부분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언제나 불쾌감을 남긴다. 괴물, 마더, 설국열차, 그리고 가장 최근의 ‘기생충’까지. 영화가 끝나면 찝찝하다는 단어로 표현하기는 부족한 미묘한 불쾌감이 한동안 떠나지 않는다. 그 불쾌감은 그의 영화가 보고 싶지 않은 ‘현실’을 보인다는 점에서 나온다. 하물며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살인의 추억>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중 가장 불쾌한 영화일 수밖에 없다.
<살인의 추억>은 피해자에게 가는 시선을 최소화한다. 피해자보다는 형사들을 전면에 내세워 가해자에 집중한다. 영화의 시작과 끝은 ‘두만’의 시점으로 전개되지만, 정작 영화 내내 관객은 ‘태윤’에 이입하게 된다. 태윤은 영화 초반에는 이성을 유지하며 직업정신으로 범인을 좇지만 점차 가해자에 대한 분노에 사로잡힌다. 관객은 이와 같은 이성에서 감정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함께한다. 영화 초반에는 증거를 조작하는 두만과 폭력으로 거짓자백을 받으려 하는 용구가 80년대 현대사의 부정적 상징으로 보였다. 그러나 피해자가 늘어날수록 그렇게 해서라도 범인을 잡아넣고 싶다는 비이성적인 충동에 휩싸이는 것이다.
영화는 범인을 지목하지 않는다. 대신 유력한 용의자인 ‘현규’의 얼굴을 오랫동안 클로즈업한다. 누군가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채우는 것은 낯선 경험이다. 화면 가득 클로즈업된 ‘현규’의 얼굴은 자꾸 변한다. 사이코패스의 표본이다 싶을 만큼 악독해 보이다가도, 맞아서 피를 흘리는 얼굴은 한없이 선하고 억울해 보이기도 한다. 결국 “모르겠다”며 욕을 뱉는 두만처럼, 나 역시 모르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마지막 씬에서 ‘두만’은 고개를 돌려 관객을 응시한다. 스크린 밖을 응시하는 그의 시선은 범인이 영화 내에 있지 않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나에게는 이 영화가 가해자에게 보내는, 악담으로 가득 찬 편지 같았다. 너의 ‘추억’은 악질이고, 너는 ‘밥을 잘 먹고 다닐’ 자격이 없다는. 터널로 도망치는 ‘박현규’의 손목에서 빛나는 수갑이 사실은 너의 손목에서 빛나고 있었어야 한다는 아쉬움 가득한 편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