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만 금을 줘도 안 바꿀

21.05.18(화)

by 어깨아빠

서윤이는 요즘 언니와 오빠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 하는 시기다. 언니와 오빠가 훈육 받을 때 취하는 자세를 똑같이 따라 하기도 하고, 특히 언니와 오빠가 먹는 건 뭐든 자기도 먹으려고 한다. 뭘 함부로 꺼내지 못한다. 그냥 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음마. 음마” 소리를 지르다가 조금 늦거나 안 주면 바로 울어버린다. 잠깐 울고 끝나는 게 아니라 그 길로 바닥 기분(?)으로 직행해서 회복 불가의 상태로 진입하기도 한다. 그게 무섭다. 그래서 막 준다. 진짜 이건 아니다 싶은 것만 빼면.


오늘도 견과류를 먹는 언니와 오빠 옆에 앉아서 자기도 저걸 달라고 그렇게도 소리를 쳤다고 했다. 결국 서윤이는 해바라기씨를 얻어냈다. 해바라기씨가 담긴 그릇을 들고 흐뭇하게 웃는 서윤이 사진을 받았다.


어제 폭풍의 시간을 보낸 시윤이는 오늘도 아내에게 쉽지 않은 시간을 선사했다. 오후에 전화로 하는 기도 모임이 있어서 방에 들어갔는데, 그때 소윤이와 시윤이는 점심을 먹고 있었다. 이미 점심 식사를 시작한 지 30분이 지났을 때였다. 1시간 30분 정도 기도 모임을 하고 다시 거실로 나왔는데, 시윤이는 여전히 식사 중이었다고 했다. 말이 식사지, 이건 식사가 아니다. 뭉그적대는 숟가락질을 바라볼 때의 그 깊은 분노란, 겪어본 사람만 안다.


“그냥 자비를 베풀었음”

“2시간 동안 뭐 했어? 하긴. 여보도 궁금하겠지”

“뭐가 궁금해?”

“시윤이가 뭐 했는지”


사랑으로 맺어지는 소중한 특수 관계이기도 하지만, 밑 빠진 독에 물을 붓고 있나 싶은 허망함이 끝도 없이 밀려올 때도 있는 특수 관계이기도 하다. 다르게 얘기하면, 진짜 깊은 사랑이 없으면, 부모의 사랑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관계랄까.


“여보”

“어, 퇴근했어?”

“어. 지금 막 차 탔어. 여보는 밖인가?”

“어, 놀이터”

“아, 나간 지 오래됐어?”

“아니. 얼마 안 됐어. 들어가고 싶다. 힘들다”

“계속 있을 거야?”

“좀 더 있어야지”


난 놀이터로 바로 안 가고 집에 올라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소윤이랑 시윤이는 그네 타느라 정신이 없었고, 서윤이는 바닥에 서서 열심히 걷고 있었다.


“서윤아”

“음마아”


소윤이, 시윤이 때도 느꼈던 감정이다. 세상에 둘도 없을 환한 미소를 건네며 아장아장 나에게 걸어오는 존재를 바라볼 때의 그 기분은. 너무나 식상하지만 억만 금을 줘도 안 바꿀 그런 순간이랄까. (진짜 억만 금 주면 바꿀지도 모르지만 누가 억만 금 줄 리 없으니까)


억만 금을 줘도 안 바꿀 미소를 봤으니, 난 떠나야 했다.


“소윤아, 시윤아. 아빠 갈게”

“아빠. 가지마여”

“아니야, 아빠 가야 돼”

“안 돼”


소윤이와 시윤이는 장난 반 진담 반으로 날 붙잡았다. 나도 이제 육아 내공이 꽤 쌓인 터라 이 정도에 흔들리지 않는다. 굳건하게 나의 길을 갔다.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올라갔고, 난 떠났다.


실컷 놀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내는 소파에 흐트러져 있었다.


“여보. 힘들었어?”

“아, 성경 공부할 때 너무 졸려서 힘들었어”

“아, 그랬구나. 애들은 바로 잤어?”

“응. 기분 좋게 잘 잤어”

“여보. 그래도 내일 휴일이야”

“그러게. 너무 좋네”


억만 금을 줘도 안 바꿀 서윤이의 다가옴과 맞먹는 기쁨과 든든함이랄까. 수요일 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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