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5.19(수)
아내와 내가 휴일을 기다린 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소윤이와 시윤이가 오늘을 기다렸다. 다른 공휴일처럼 아빠가 쉬는 날이라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고모(내 동생)네 집에 가기로 했다. 오늘 고모네 집에 가기로 약속을 정한 날부터 몇 번이나 확인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빠. 수요일에 쉬는 날 고모네 집 가는 거져?”
그냥 고모네 가는 것만 해도 좋은데 좋을 이유가 또 있었다. 태어난 지 한 달 정도 된 고모의 딸(내 조카)을 보러 가는 거였다. 그것도 너무 기대했다. 뭐 설레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동생 집에 점심때쯤 가기로 했는데 그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또 하나 있었다. 수리 맡겼던 차를 찾아와야 했다. 크게 보자면 온 가족이 차를 타고 가서 올 때는 두 대로 나눠 오는 방법이 있었고, 나 혼자 가서 찾아오는 방법이 있었다. 일단 온 가족이 가는 건 아니었다. 이른 아침부터 너무 분주하고 비효율적인 방법이었다. 혼자 대중교통 타고 가서 가지고 올 생각이었다.
그러다 어제 갑자기 계획을 변경했다. 시윤이를 데리고 가기로 했다. 소윤이는 집에 두고 시윤이만. 사연이 있었다. 소윤이랑 나이가 같은 첫째를 둔, 우리와 친한 여러 가정에서 첫째와 엄마의 데이트를 했거나 할 예정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아내와 나는 충동적으로(?) 우리도 그렇게 하기로 했다. 예정일은 돌아오는 토요일이었다. 서운해할 시윤이를 위해 급히 마련한 예방책이 오늘 시윤이랑 둘이 가는 거였다. 물론 무게를 따지자면 엄마와 아빠가 아직은 비교가 안 되지만, 이게 시윤이에게 베풀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시윤아. 엄마랑 누나는 이번 주 토요일에 데이트를 할 거야”
“저는여?”
“아, 누나랑 엄마가 데이트하는 거니까 시윤이는 아빠랑 서윤이랑 같이 있고”
“나도 데이트하고 싶은데”
“그치? 그래서 대신 오늘은 시윤이랑 아빠랑 둘이 지하철이랑 버스 타고 가서 차 찾아오기로 했어. 어때?”
“좋아여”
엄마랑 갈래 아빠랑 갈래라고 물어보면 아마 백 번 중에 아흔 아홉 번을 엄마랑 가겠다고 할 거다. 그만큼 소윤이와 시윤이의 삶에서 아내가 차지하는 비중은 어마어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윤이와 시윤이는 아빠하고’만’ 시간 보내는 것도 좋아한다. 시윤이는 내 손을 잡고 즐겁게 집에서 나왔다.
아무도 없는 버스에 시윤이랑 둘이 타서 맨 뒷자리에 앉았다. 시윤이는 궁금한 게 참 많았다. 전기 버스랑 그냥 버스랑 뭐가 다른 건지, 전기 버스는 왜 조용한 건지, 트렁크는 어디 있는 건지 등등. 지하철역까지 가는 내내 궁금한 걸 물어봤다. 온전히 시윤이에게만 집중할 수 있으니 대답도 성실하게, 성의 있게 해 줬다. 시윤이랑 시간을 보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은근히 차분하고 정적인 면이 많은 아이다. 전통적으로, 전형적으로 생각하는 ‘아들’의 느낌하고는 거리가 있다. 신기하게도 누나랑 같이 있으면 그런 게 잘 안 드러나는데 혼자 있을 때는 굉장히 선명해진다. 시윤이랑 시시콜콜한 이야기 나누는 재미가 있어서 좋다.
차를 무사히 찾아서 오는 길에 카페에 들렀다. 아내와 나의 커피를 사면서 시윤이가 먹을 쿠키도 샀다. 카시트도 조수석으로 옮겼다. 편의점에 들러서 마실 것도 고르게 했다. 시윤이는 자기 마실 거 하나, 누나가 마실 거 하나를 골랐다.
“아빠. 이거 많이 흘릴 거 같은데여?”
“어, 괜찮아. 그건 아빠가 먹어도 흘릴 수밖에 없겠다. 조심해서 먹기는 하는데 흘리면 어쩔 수 없으니까 그냥 먹어”
작고 통통한 손으로 쿠키를 조심스럽게 조각내서 오물오물 씹는 걸 보니, 또 한없이 아기 같았다. 둘이 있을 때만, 눈치 안 보고 할 수 있는 사랑의 표현을 마구 날렸다.
“시윤아. 시윤이는 어쩜 이렇게 먹는 게 귀엽고 아기 같아?”
“이게 뭐 귀여운 건가?”
말은 저렇게 하는데 얼굴에는 웃음이 퍼진다.
열심히 쿠키를 먹던 시윤이가 쿠키가 담겨 있던 비닐의 입구를 다시 봉하며 얘기했다.
“아빠. 이건 누나 줄래여”
“그럴래? 시윤이 다 먹어도 되는데”
“누나 주고 싶어여”
아마 누나가 저번에 자기 몫을 남겨 왔던 걸 기억하는 듯했다. 자녀의 어떤 모습을 볼 때 가장 흐뭇하다고 누군가 묻는다면 형제, 자매, 남매끼리 우애 깊은 모습을 보여줄 때라고 주저하지 않고 답할 거 같다. 사이좋은 자녀들의 모습을 볼 때 느껴지는 고유한 감정이 있다.
아내와 소윤이, 서윤이는 나갈 준비를 모두 마치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시윤이는 소윤이에게 절대 보지 말라고 하면서 먹다 남긴 쿠키와 초코 우유를 건넸다. 재정 자립도가 0인 시윤이가 건넬 수 있는 가장 큰마음의 표현이었다. 소윤이도 기쁘게 받았다.
동생네 집에 도착했을 때 조카(이미 ‘아빠’라는 새로운 직책에 익숙해져서 그런가, ‘삼촌’이라는 새로운 호칭이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았다)는 자고 있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거대한 TV를 보니 또 마음이 동했는지
“아, TV 보고 싶다”
라며 혼잣말로 위장한 욕구를 표현했다. 뭐 날과 장소가 특별한 만큼 기꺼이 그들의 요청을 수용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참 소박하다. 10분짜리 만화 세 편 정도면 ‘엄청 많이’ 봤다고 생각한다(오늘은 그것보다 더 많이 보여 주긴 했다). 나중에 조카가 깼는데 소윤이와 시윤이는 잠깐 가서 보더니 금방 TV 앞으로 돌아왔다. 사촌 동생 빨리 보고 싶다고 노래 부를 때는 언제고. 사실 나도 그맘때의 아기는 재미가 없다. 딱 요즘 서윤이 정도는 돼야 재미가 난다. 가만히 누워서 눈만 껌뻑껌뻑 하는 게 참 어여쁘긴 해도 한 시간, 두 시간이고 앉아서 볼 만큼은 아니다. 물론 첫 조카였다면 조금 달랐을 거다. 이미 세 명의 아이를 키워서 그런가 조카의 존재보다 동생이 엄마가 됐다는 사실이 더 신기했다.
아내는 달랐다. 물론 시누이의 아기니 나보다는 조금 더 가공된 반응을 보여야 한다는 의무감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아기’라는 생명체를 향한 애정과 애틋함이 남다른 사람인 것 같다. 그러니 엄마 노릇 하는 건가. 한창 힘든 시간을 보내느라 혼자 울기도 했다는 동생에게 아내는, 조언과 제언의 선을 넘어 오지랖과 꼰대의 충고가 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줬다(동생이 무슨 사연이 있는 건 아니다. 그냥 그맘때 애 키우면 느껴지는 ‘출구 없는 터널에 갇힌 건 아닌가’ 증후군에 시달리느라 힘들었다고 했다).
저녁으로 먹을 회를 사러 소래포구에 다녀왔다. 소윤이와 시윤이에게는 ‘바닷가’에 갈 거라고 얘기해서 둘 다 엄청 기대를 했다. 보통 생각하는 해변은 아니고 배가 드나드는 항구의 풍경일 거라고 얘기도 해 줬다. 안타깝게도 바닷물 구경도 못했다. 수조에 갇혀 순번을 기다리는 물고기만 잔뜩 보고, 무자비하게 내려치는 아주머니의 칼질만 실컷 봤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아쉬워하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재밌었나 보다.
한참 놀았다. 조카가 꽤 오래 깨어 있었을 때도 있었는데, 그때도 소윤이와 시윤이는 할머니랑 노는 데 정신이 팔렸다. 그래도 사촌 동생이 보고 싶기는 했는지 중간에 한 번씩 방에 들어가서 보고 나왔다. 우리 집에서만 볼 때는 서윤이가 마냥 아기였는데, 조카를 보고 나니 세상의 모든 이치를 통달한 것처럼 커 보였다.
평소라면 자러 들어갔을 시간에도 여전히 동생네 집이었다. 돌아오는 차에서 다 잠들 거라고 생각하고 양치까지 시켜서 출발했다. 의외로 둘(소윤이, 시윤이) 다 잠들지 않았다. 오히려 둘이 엄청 시끄럽게 떠들고 장난치면서 오느라 잠들 틈이 없었다. 그 시끄러운 와중에 서윤이만 곯아떨어졌다.
서윤이가 잠든 바람에 소윤이와 시윤이는 엄마 없이 들어가서 잤다. 슬펐을 거다. 그래도 소윤이와 시윤이의 심정을 헤아려 주기에는 아내도 나도 너무 피곤했다. 아내와 나는 각자 해야 할 일을 하겠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거기까지였다. 몸을 움직이기에는 너무 고단했다. 평소보다 일찍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