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5.20(목)
평소에 아내가 전화를 하는 시간보다 이른 시간에,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시윤이가 좀 이상해”
“왜?”
“입술에 핏기가 하나도 없고 속이 울렁거린대”
“열은?”
“열은 안 나”
“저번처럼 또 그런 건가?”
“글쎄. 아무튼 울렁거린다고 그러고 애가 기운이 하나도 없어”
“일단 초콜렛 먹여 봐”
“먹이긴 했어”
“지금은 어떻게 하고 있어?”
“그냥 내 무릎에 힘없이 누워 있어”
“어제 밥을 많이 안 먹었나?”
“그러게. 아니면 공복 시간이 너무 길어서 그런가”
“모르겠네. 증상은 그때랑 똑같지?”
“맞아. 딱 그때 그 모습이야”
처음 이런 증상을 보이고 두어 번 정도 더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때마다 급히 초콜렛을 먹이고 잠깐 재우면 멀쩡해졌다. 오늘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때랑 비슷했다. 통화를 끝낸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다시 아내에게 카톡이 왔다.
“시윤이 나옴”
“벌써?”
“좀 괜찮다는데?! 그리고 입술색이 돌아왔어”
“그래? 조금 더 두고 봐야겠다. 엄청 조금 잤네?”
“거의 잔 느낌은 아니고 지쳐서 눈만 감고 있었던 것 같아”
아내가 찾아보니 저혈당 증세라는데, 시윤이의 증상도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공복 시간이 길어지면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난다. 평소에 코피도 자주 흘리고 그러는 걸 보면 타고난 체력이 조금 약한가 싶기도 하다. 마음도 감성보이, 아픈 것도 감성보이. 감성 터지는 우리 둘째. 그 뒤에는 완전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서 더 이상 걱정을 하지 않았다.
멀리 외근을 다녀와서 오히려 평소보다 일찍 집에 도착했다. 막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는데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어디야?”
“어, 이제 가려고”
“아, 아직 거기야? 이제 출발하는 거야?”
“응. 이제 출발해야지”
“알았어. 중간에 연락 줘”
난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어디에서 가고, 어디에서 출발하는지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문도 일부러 비밀번호로 눌러서 열지 않고 보안 열쇠를 통해서 한 번에 열었다. 주방에서 요리를 하던 아내는 화들짝 놀라서 현관으로 튀어나왔고 서윤이는 가장 먼저 나를 환하게 맞아줬다. 아내는 서윤이가 문을 열고 나간 건 줄 알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아, 우리 아빠는 너무 장난꾸러기야”
소윤이와 시윤이가 요즘 나에게 가장 자주 하는 말이다.
저녁에는 처치홈스쿨 교감선생님 집에 갔다. 서윤이 손가락 경과(?)도 보고 다시 처치도 해주신다고 해서, 간 김에 저녁도 같이 먹기로 했다. 나중에 들어 보니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낮에 잠깐 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약속이 취소되었고, 소윤이와 시윤이가 큰 상심에 빠졌다. 그걸 위로도 할 겸 저녁을 같이 먹게 된 거였다.
다행히 오늘은 서윤이가 지난번보다는 훨씬 얌전히 밥을 먹었다. 어른들의 음식은 쭈꾸미였다. 감히 쌈 싸 먹을 여유는 오늘도 허락되지 않았지만, 가만히 앉아서 진지를 자셔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저녁을 먹고 나서는 다 함께 1층에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애들은 애들대로 놀고,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수다를 떨고. 그러다 누군가
“어? 서윤이 어디 갔지?”
라고 얘기했다. ‘뭐 어디 안 보이는 곳에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찾았는데 안 보였다. 설마 2층으로 올라갔나 싶어서 2층에도 가 봤는데 안 보였다. 대신 서윤이 특유의 낑낑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서윤이는 3층과 4층 계단 사이에서 어쩌지 못하고 누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른들이 한 눈을 판 사이에 혼자 1층에서 3.5층까지 사족 보행으로 올라 간 거다. 굉장히 아찔한 일이었다. 아이 셋을 기르며 다양한 경험도 쌓고 여러 상황도 마주해서 나름 웬만한 상황에는 유연하게 대처한다고 생각하지만, 이게 또 단점이다. 방심은 언제나 사고를 낳는다. 계단에서 굴러도 별일 없기도 하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일이 생기기도 하는 거다.
저번에 갔을 때보다는 이른 시간에 돌아왔지만, 그래도 엄청 늦은 시간이었다. 오늘도 서윤이는 잠들었고, 소윤이와 시윤이는 엄마 없이 들어갔다.
“아빠. 어제도 엄마랑 못 자고 오늘도 엄마랑 못 자니까 너무 서운해여”
“소윤아. 맨날 엄마랑 자잖아. 그러다 겨우 이틀인데 뭐. 맨날 엄마랑 잘 때는 그럼 그냥 엄마가 안 재워줘도 되겠네”
말인지 방구인지, 분명히 이상한 말인데 맞는 것 같은 말로 소윤이의 서운함을 산화시켰다. 아내가 기꺼이 들어가겠다고 했으면 뭐 그럴 필요가 없었겠지만, 아내가 이미 아이들한테 들어가지 않을 거라고 말한 뒤였다.
들어가도 어차피 금방 잠들 거면서 그렇게 엄마를 찾을까.라고 쓰니
그럼 어차피 금방 잠들 거 잠깐 들어가 주는 게 그렇게 어렵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아니다. 고려되지 않은 변수가 있다. 그래서 못 들어간다.
금방 잠드는 애들보다 아내가 훨씬 더 빨리 잠들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