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8.20(금)
며칠 전에 장모님께서 아내에게 이번 주에는 집(장모님 집)에 안 오냐고 물어보셨다고 했다. 아내는 어쨌든 금지된 모임(?)인데 너무 대놓고 무시하며 가기에는 내키지 않는다고 답을 드렸다고 했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장모님이 무척 아쉬워하셨다고 했다. 물론 딸과 손주를 보고 싶으셔서 아쉬운 것도 있겠지만, 하루 종일 애들이랑 씨름하느라 고생인 딸을 그렇게라도 쉬게 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제안이기도 했을 거다.
“엄마 오셨음. 내가 못 간다고 하니 오셨네”
오늘따라 일이 제시간에 안 끝나서 원래 퇴근 시간보다 30분 정도 늦게 나왔다. 나오기 전에 아내에게 전화했다.
“여보. 뭐해?”
“아, 나 잠깐 나가려고”
“저녁 준비?”
“아, 지금 엄마가 애들 데리고 잠깐 나가셨거든. 나도 나가서 장도 보고 그러려고”
“난 아직 사무실이야”
“아, 왜? 일이 안 끝났어?”
“어”
“오래 걸려?”
“아니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고”
“그래? 그럼 여보 뭐 샌드위치 같은 거 사 놓을까?”
“그럴까?”
“집에 들러서 밥 먹고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겠다”
사실 나의 부재로 촉발되는 독박 육아와 금요일 육아의 고단함을 분담해 줄 장모님이 계시다고 하니, 집에 들르지 않고 바로 교회로 갈까 싶은 마음도 있었다. 다만 고민은 하나였다.
‘애들 얼굴 잠깐이라도 보고 싶은데’
아, 사실 아내 얼굴이 더 보고 싶었지. 까먹고 안 쓸 뻔했네.
진짜 ‘잠깐’ 집에 있다가 나와야 할 만큼 늦었지만, 그래도 집에 들르기로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뭔가 들뜬 상태였다. 시윤이는 머리도 젖어 있었다. 땀인지 물인지 눈으로는 분간이 가지 않았는데 장모님과 소윤이의 대화로 유추해 보면, 막 샤워를 하고 나온 것 같았다. 표정은 좋지 않았다. 입을 잔뜩 내밀고 심술궂은 표정을 애써 드러냈다.
“시윤이는 왜 그래?”
“아, 이제 할머니 간다고 하니까 그런가 봐”
장모님이 소윤이에게도 샤워를 하자고 했는데 소윤이는 ‘조금만 더’ 전략을 구사하며 나를 팔았다. 결국 ‘아빠가 나가면’ 샤워를 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장인어른도 계셨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사실 장인어른과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한테 인사하는 것도 거의 도장 찍고 가듯 형식적이었다.
막내 서윤이만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진심으로 나를 환영했다. 서윤이도 졸렸는지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아빠가 반가우니, 짜증을 조금은 자제하는 느낌이었다(과대해석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냥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장인어른과 할리갈리를 하고 있었는데 두 녀석의 말과 행동, 태도가 계속 눈과 귀에 거슬렸다. 할아버지에게는 공손하지 않게 말하고, 서로를 향해서는 불친절과 비아냥이 가득했다. 장인어른이 계시지 않았으면 아마 바로 불러 세웠을 거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사 주신 것으로 추정되는 찜닭이 끓고 있었다. 집에서 나가기 전에 잠깐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었다. 집에 뭔가 차분함이 없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소윤이와 시윤이는 신나긴 했지만 뭔가 불안했고 장모님도 얼른 저녁을 차려줘야 한다는 생각에 바쁘셨고 아내는 ‘얼른 퇴근’을 머리에 새긴 듯 지쳐 보였다. 나도 바빴다. 집에 머문 시간은 20분 정도였다. 그래도 애들 얼굴 보고 한 명씩 뽀뽀했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그러려고 온 거다.
소윤이는 어제 다친 무릎에서 진물이 많이 나왔다. 서윤이도 어제 넘어져서 무릎이 아주 살짝 까졌는데 오늘도 넘어졌다. 어제 살짝 까졌던 곳을 똑같이 다쳤고 완전히 살이 벗겨지고 언니처럼 피가 차올랐다. 집에서 나오기 전에 서윤이를 붙잡고 알코올 소독을 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많이 울지도 않았고, 그나마도 그 순간 잠깐이었다. 어제 소윤이보다 의연했다.
아내가 오늘은 맛있는 커피를 마셨을까 생각하다가 아까 얼핏 본, 식탁 위에 놓인 빵 봉지가 떠올랐다. 어제까지는 없었던 거였다. 주말을 맞아, 친정 엄마 찬스를 이용해 준비해 둔 아내 스스로를 향한 작은 보상일 거다. 커피를 마셨는지 안 마셨는지는 고민을 안 해도 될 거 같았다.
여보. 드디어 또 주말이야. 이번 주는 시간이 빨리 갔네. 주말도 빨리 가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