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즐기는 방법

21.08.21(토)

by 어깨아빠

아내는 오늘도 치과 진료가 있었다. 오전 10시였다. 내가 일어났을 때 아내는 이미 애들 아침을 차려서 먹이고 있었다. 워낙 가깝기도 하고 크게 준비할 필요도 없어서 그런지 별로 분주해 보이지는 않았다. 아내는 여유롭게 나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집에서 나갔다.


“아빠아. 우리이 오늘은 진짜 엄마 놀래켜 주러 갈까여어?”


시윤이는 아내가 나가자마자 나에게 얘기했다. 지난주에 실행하려다가 너무 늦어서 무산됐던 ‘엄마 놀라게 하기’ 작전을 말하는 거였다. 나도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지만 비도 많이 내리고 그래서 그냥 집에 있으려고 했는데 시윤이가 말을 꺼낸 거다.


“아빠가 생각 좀 해 볼게”


잠깐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아내가 예상을 할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몰래 차에 숨어 있다가 운전석에 앉는 아내를 놀라게 하는 생각만으로도 흥분이 됐다.


“소윤아, 시윤아. 그러면 아빠 화장실 갔다 올 동안 옷 갈아입고 있어”

“아빠. 엄마한테 가게여?”

“어, 가자”


소윤이는 자기 옷은 물론이고 시윤이 옷까지 찾아서 챙겨줬다.


“아빠아. 버스 타고 가여어?”

“아, 아니. 택시”


어영부영하다 보니 어느덧 또 시간이 많이 흘러서 마음이 바빴다. 현관에서 서윤이 신발을 신기면서 카카오 택시를 불렀다. 비가 제법 많이 내렸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각각 앉히고, 서윤이는 내가 안고 앉았다. 아내가 있는 치과를 향해 가면서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흥분됐다.


“자자 소윤아, 시윤아. 얼른 타”


병원 주차장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아내가 타고 온 차로 옮겨 탔다. 물론 집에서 보조 열쇠도 챙겨왔다. 나도 아이들과 함께 뒤쪽에 앉았다.


“아빠. 엄마 어떻게 놀래켜여?”

“아, 여기서 보다가 엄마 나오시면 다 몸을 숙여. 없는 것처럼”


소윤이와 시윤이는 즐거워했다. 난 더 즐거웠고. 우리가 차에 타고 5분도 안 돼서 아내가 나왔다. 다행히 아내는 비 때문에 정신이 없는지 크게 살피지 않고 부랴부랴 운전석에 올라탔다.


“워”

“아악, 깜짝이야”


대성공이었다. 이 순간을 위해 비를 뚫고 택시를 탔고 5,000원을 태웠다. 너무 재밌었다. 다만 마치 불꽃놀이 같았다. 절정의 순간이 너무 짧았다.


“엄마. 우리 이제 집에 가여?”

“그럼 가야지”

“뭔가 아쉬운데 어디라도 갈까여?”

“어딜?”

“그냥 스타필드라도?”

“아니야. 집에 가야지”


소윤이의 그 기분이 무엇인지는 알 것 같았다. 그래도 뭐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어디 갈 데도 없었다.


“여보. 이대로 쏠까?”

“어디를?”

“그냥 뭐 ‘오늘’이라도 가든가”

“진짜? 그럴래?”

“너무 갑작스럽지? 그냥 나도 좀 아쉬워서”


파주에 있고 처가에서 엄청 가깝지도 않아서 자주 가지 못하지만, 좋아하는 카페를 말하는 거였다. 아내 말처럼 그대로 쐈다. 비가 꽤 묵직하게 내렸다.


“소윤아, 시윤아. 엄마랑 아빠 커피 사러 ‘오늘’ 카페 갔다가 집에 가서 우비 입고 놀이터 갈까?”

“좋아여 좋아여. 아빠. 가슴 장화 신으면 안 돼여?”

“아, 아빠가 말한 게 그거였어. 가슴 장화”


다들 신나는 마음을 안고 깜짝 드라이브를 즐겼다. 한 20분 정도를 달려서 도착했는데, 카페 문이 닫혀 있었다.


“어? 여보 문 닫았는데?"

“진짜?”


아내가 인스타그램으로 찾아봤는데, 아직 문 열 시간이 안 된 거였다. 50분이나 남았고 기다리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었다. 아내는 아쉬워하며 집으로 돌아가야지 어쩌겠냐고 했지만, 난 왠지 우리가 그냥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았다. 역시 나의 예감대로 우리는 다른 대안을 찾아냈다. 정확히 말하면 아내가 찾았다. 거기서 또 한 30분 떨어진 곳(그래도 집에서 더 멀어지는 건 아닌)에 있는 도넛 가게에 가자고 했다. 예전에 아내와 시윤이가 데이트할 때 갔던 곳이라고 했다.


비는 더 세차게 내렸다. 애초에 그렇게까지 멀리 나올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옷차림도 추레했다. 주차하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그 짧은 시간에도 옷이 젖을 정도로 비가 거칠게 몰아쳤다. 힘들거나 지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냥 재밌었다. 다만 서윤이가, 자기를 뺀 나머지 식구가 도넛 먹는 걸 곱게 봐 주지 않으면 그때는 힘들 것 같았다.


걱정스러운 마음을 안고 자리에 앉았다. 아니나 다를까 서윤이는 자기도 도넛을 먹고 싶다는 듯한 몸짓을 보이며, 내 품에서 내려가겠다고 했다. 어차피 뭐 길게 앉아 있을 건 아니었고 도넛만 먹고 가면 되니까 담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에 힘을 빡 주고 긴장했다.


주문한 도넛 중에 초당 옥수수 쪼가리가 장식처럼 올라간 게 있었다. 그 초당 옥수수 쪼가리를 서윤이에게 줬다. 이게 의외의 묘수였다. 한 15분 정도 될까 말까 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앉아 있었다. 서윤이는 그 작은 조각을 아그작아그작 씹기도 하고 빨기도 하면서 좋아했다. 두 개는 먹고 두 개는 포장해서 가지고 왔다. 아, 그중 한 개는 아내가 돌아오는 차 안에서 먹었다.


일단 점심을 먹어야 했다. 하루 종일 비가 온다고 했으니 점심을 먹고 나가도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다. 맛있게 점심을 먹는데 갑자기 날이 개기 시작했다. 개는 정도가 아니라 파란 하늘이 드러나고 해가 쨍쨍하게 떴다.


“어, 아빠. 비가 그쳤어여”

“그러게”

“어어. 안 되는데”

“그러게. 날이 맑아졌네”


소윤이와 시윤이는 아쉬워했다.


“소윤아, 시윤아. 내일도 비 온다고 했으니까 내일도 기회가 있겠지. 그래도 오늘 엄마 놀래킨 거 재밌었잖아”


소윤이와 시윤이는 금방 아쉬움을 잊었다. 대신 집에서 책도 읽고 우노도 하고 할리갈리도 하고 그랬다. 비는 그쳤지만 잠깐 바람이라도 쐬러 나가기로 했다. 아내가 오늘도 집에 있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얘기는 하지 않고 나갈 준비를 했다.


“아빠. 비가 와여”

“진짜? 어? 그러네”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 모두 우비를 입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 내렸는데 꽉 찬 쓰레기봉투를 두고 온 게 생각이 났다.


“내가 올라갔다 올게”


마침 화장실도 가고 싶어서 잠깐 집에 들어갔는데, 엄청난 유혹을 느꼈다.


‘아무도 없으니까 진짜 조용하네. 잠깐 누워서 자고 싶다’


물론 조금도 실행할 의지가 없는 아니 느끼면 안 되는 유혹이었다. 쓰레기봉투를 들고 다시 1층으로 내려갔는데 아내가 얘기했다.


“여보. 비가 그쳤어”

“어, 그러네?”

“서윤이 유모차 가지고 올까?”

“그럴까?”


다시 올라가서 유모차를 가지고 내려왔다. 비가 오면 유모차에 태워서 걷기가 힘드니까 그냥 서윤이를 걷게 할 생각이었다. 사실 아직은 서윤이가 직접 걷게 하는 게 그리 편한 일은 아니다. 통제도 안 되는 데다가 걷기 싫다고 하면 꼼짝없이 안아줘야 하니까. 외출할 때 유모차는 아주 든든한 믿을 구석이다.


한살림에 가서 장 보는 것 말고는 아무런 목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동네를 좀 걸으려고 했다.


“어? 아빠. 또 비가 와여?”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좀 부슬부슬 내리더니 점점 빗발이 굵어졌다. 마침 서윤이도 유모차에서 잠들기 직전이었다.


“여보. 그럼 여보가 서윤이 데리고 먼저 올라가. 나는 애들이랑 놀이터에서 좀 놀다 들어갈게”

“그럴까?”

“어. 여보는 여유롭게 저녁 준비하면 되겠네”

“그래야겠다”


아내는 서윤이와 함께 올라갔고 난 소윤이, 시윤이와 함께 놀이터로 갔다. 당연한 얘기지만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비를 흠뻑 맞으며 그네도 타고 미끄럼틀도 타고 놀았다. 이 놀이터 저 놀이터 옮겨 다니면서 알차게 놀았다. 다시 한번 소윤이와 시윤이 특유의 성격을 확인했다. 둘 다 뭔가 극도의 흥분으로 쉽게 치닫지는 않는다. 오히려 굉장히 차분한 느낌이었다. 분명히 재밌는 건 맞지만 막 방방 뛰고 소리 지르고 그러지는 않았다. 둘 다 어릴 때도 그랬다. 더군다나 소윤이는, 얼마 전에 다친 무릎도 엄청 신경이 쓰이고 오늘 장화를 신었다가 까진 발도 무척 신경이 쓰였는지 노는 데 집중을 못 했다. 집에 들어가는 것도 소윤이가 먼저 들어가자고 했다.


아내는 저녁 준비에 한창이었다. 서윤이는 유모차에 누워서 자고 있었는데 우리가 들어가는 소리에 깼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바로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할 때마다 ‘제대로 물놀이 한 번을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측은하다. 샤워기로 재미있게 해 주기 위해서 많이 노력했다. 소박한 소윤이와 시윤이는 차가운 물을 뿌려주기만 해도 깔깔대며 뒤집어진다.


저녁에는 아이들도 함께하는 온라인 모임이 있었다. 바쁘지는 않았다. 저녁 준비를 일찍 시작하기도 했고 수월하기도 했다. 여유롭게 저녁을 먹고 미리 앉아서 준비했다. 가만히 앉아서 들으려니 졸렸는지 시윤이가 유독 힘들어 보였다. 서윤이는 혼자 잘 놀았다. 그러고 보니 낮잠을 두 번이나 자서 기분이 좋았나 보다. 이럴 때는 좋은데 잘 때는 안 좋다.


서윤이는 오늘도 잘 생각이 없었다. 아내가 데리고 들어간 지 한참이 지났지만 서윤이 소리가 들렸다. 기분 좋게 웃고 장난치는 소리도 아니고 서럽게 우는소리였다. 아마 자기 싫으니까 나가자고 했겠지.


“서윤이 심하네. 차라리 데리고 나와”


어차피 자지도 않을 거 그냥 데리고 나와서 놀게 하다가 들어가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철저히 아내의 입장에서. 재우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면 아내가 또 힘드니까. 아내는 내 말대로 서윤이를 잠깐 데리고 나왔다. 반가웠다.


“서윤아. 이리 와. 아빠가 안아줄게”


처음 나왔을 때는 방긋 웃어주더니만 오라고 하니까 또 싫다고 하면서 아내의 품으로 가서 손을 빨았다. 잠깐 데리고 놀다가 아내와 함께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자기가 들어가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다시 또 나왔다.


“언니랑 오빠 사이에 앉아서 둘러보더니 또 나가재. 자기 싫은가 봐”


물 한 모금 마시고 조금 놀다가 다시 들어갔다. 그때는 조용했다. 그제서야 좀 자는 것 같았다. 조용해지고도 한참 동안 아내가 나오지 않길래 잠들었나 싶었다. 화장실 다녀오면서 봤더니 방문이 살짝 열려 있길래 조심스럽게 문을 더 열었다. 서윤이는 자고 있었고 아내는 벽에 기대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귀에는 이어폰이 꽂혀 있었고 휴대폰은 가로로 들고 있었다.


“슬의생 봐?”

“어”


아, 그랬구나. 힘든 게 아니었구나.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재밌는 거였구나. 그랬구나. 어쩐지 별로 힘들어 보이지 않더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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