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0.30(토)
아내가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다. 오전에 나가서 하루를 자고 오기로 했다. 아내 친구가 데리러 온다고 했다. 시윤이는 마지막까지 엄마가 가는 게 싫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별생각 없이 아내를 보내려다가 다 함께 내려가기로 했다. 고작 하루지만 아이들에게는 ‘고작’이 아닐지도 모르니 조금이라도 아쉬움을 덜어 내라는 뜻을 담아서.
애들 옷을 입힐 때 ‘나간 김에 밖에서 시간을 좀 보내고 들어오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그냥 내복 위에 두툼한 겉옷을 입혔다. 옷을 입히는 게 귀찮기도 했고, 뭔가 본능적으로 ‘일단 집에 다시 와야지’하는 바람이 있었다. 서윤이도 유모차에 태우지 않고 신발을 신겨서 걷게 했다.
세 녀석은 이모 차에 탄 엄마가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서윤이가 울지 않는 게 여전히 신기하다. 소윤이, 시윤이 때는 한바탕 울음바다가 돼도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막내라 엄마 말고도 믿을 구석이 많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내가 떠나고 발걸음을 돌려 다시 집으로 오려고 하는데 소윤이와 시윤이가
“놀이터에서 잠깐만 놀다 가면 안 돼여?”
라고 물었다.
“아, 놀이터?”
라고 대답하고 10초 정도 고민했다. 바로 들어가기 싫을 만큼 선선한, 딱 내가 좋아하는 온도였다. 다만 놀이터에 가면 얌전히 있을 리 없는 서윤이를 생각하니 엉치뼈에서부터 시작된 피로감이 뒷골을 타고 올라오는 듯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아주 잠깐만이라도여’라며 간절함을 표시했다.
“그럼 우리 놀이터는 좀 그렇고 동네 산책을 하자. 놀이터에 가면 서윤이 대문에 아빠가 너무 힘들 거 같아”
일단 집으로 와서 소윤이와 시윤이는 옷을 갈아입었다. 서윤이 유모차도 태우고. 서윤이는 언니와 오빠가 집으로 들어가자 외출이 끝난 줄 알고
“시여 시여 시여”
를 연발하며 울었다.
다시 밖으로 나왔는데 서윤이가 약간 졸려 보였다. 바로 손가락을 빨기도 했고, 옷에 달린 모자가 눈을 가렸는데도 가만히 있었다. 소윤이도 눈치를 챘는지 계속
“아빠. 서윤이 좀 눕힐까여?”
“아빠. 서윤이 가리개 좀 더 내릴까여?”
라고 물어봤다. 일단 좀 걸으면서 동태를 살피기로 했다. 처음에는 언니와 오빠를 찾으며 시끄럽게 떠들다가 금방 조용해졌다. 눈을 뜨고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한 쪽 눈이 가려진 채로 손가락을 빨았다. 무엇보다 눈동자에 힘이 없었다.
“소윤아, 시윤아. 서윤이 잘 거 같아. 우리 크게 한 바퀴를 일단 돌아보자”
“아빠. 서윤이 자면 놀이터 가도 돼여?”
“어, 되지”
다행히도 서윤이는 놀이터에 도착하기 전에 잠들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막상 놀이터에서는 엄청 재밌게 놀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단지 안 놀이터에서 놀다가 단지 근처에 있는 놀이터에 가고 싶다고 해서 거기로 자리를 옮겼다.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보이는 아이들 열댓 명 정도가 놀이터에 바글바글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거기서도 노는 둥 마는 둥 했다. 서윤이도 예상보다는 일찍 깼다. 물론 그래도 꽤 오래 있었지만.
“소윤아, 시윤아. 우리 이제 들어가자. 점심 먹고 또 나오든지 하자”
점심 먹고 또 나올 생각이었다. 어디가 됐든 밖에서 시간을 보낼 계획이었다. 시윤이는 장모님이 해 주신 호박죽이 먹고 싶다고 해서 그걸 줬다. 서윤이도 그걸 줬고. 소윤이와 나는 호박죽을 안 좋아해서 장모님이 해 주신 반찬과 함께 밥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일단 설거지를 했다. 그릇이 쌓이는 순간 후회도 쌓이기 때문에 귀찮음을 밀어내고 싱크대 앞에 섰다. 설거지를 마치고 나니 어마어마한 무게의 피로가 몰려왔다.
“와, 소윤아, 시윤아. 아빠 너무 졸리네”
라고 말하면서 소파에 누웠다.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는 잘 놀고 있었다. 얼마나 졸렸는지 그 시끄러운 와중에도 20-30분을 달콤하게 잤다. 아빠의 낮잠이 너무 길어질까 봐 걱정이 됐는지, 소윤이가 내 옆으로 와서 입으로 바람도 불고 톡톡 건드리고 그랬다. 그러지 않았으면 한참 더 잤을 거다. 소윤이 덕분에 수면 상태에서 탈출하긴 했지만 여전히 비몽사몽이었다. 벌떡 일어나면서 아이들에게 얘기했다.
“얘들아. 옷 입어. 나가자”
서윤이는 내복이라 옷을 갈아입혀야 했다.
“소윤아. 서윤이 옷 어디 있지?”
“서윤이 옷이여? 잠깐만여. 제가 찾아보고 올게여”
소윤이는 티와 바지를 하나 찾아서 나에게 건넸다.
“아빠. 이렇게 입히면 될 거 같아여”
“오, 그래. 고마워”
사실 아까 소윤이, 시윤이 옷 갈아입을 때도 소윤이가 진두지휘를 했다. 난 아예 집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았다.
자주 가는 작은 공원에 가기로 했다. 카페에서 커피도 한 잔 샀다. 밖에서 놀기에는 딱 좋은 날씨였다. 가만히 그늘에 앉아 있으면 서늘하지만 볕 아래서 조금 움직이면 시원한 바람이 느껴지는 그런 날씨였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오히려 여기서 놀이터에서보다 신나게 놀았다. 땅따먹기(사방치기)를 재밌게 했다. 아직 어설프고 부족한 시윤이에게 칼날 같은 잣대와 기준을 들이대려는 소윤이를 지도편달하느라 애를 좀 먹긴 했지만, 괜찮았다. 서윤이는 유모차에서 내려오겠다는 얘기도 안 하고 언니와 오빠가 노는 걸 재밌게 지켜봤다. 내가 먼저 서윤이에게 얘기했다.
“서윤아. 서윤이도 내려 줄까?”
“응”
유모차에 앉아 있기만 하다가 돌아가는 건 너무 불쌍하기도 했고, 놀이터에 비하면 훨씬 안전했다. 안전하다는 건 그만큼 덜 긴장하고 덜 쫓아다녀도 된다는 뜻이다. 안 내려 줬으면 어쩔 뻔했나 싶을 정도로, 이리저리 잘 돌아다녔다. 기특하게 언니와 오빠가 노는 건 방해하지 않았다(방해하려다가도 ‘서윤아. 그건 언니랑 오빠가 노는 거야’라고 하면 씨익 웃으면서 다른 데로 가고 그랬다). 그러다 실컷 놀았는지 자기가 먼저 유모차에 다시 앉겠다고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아쉬움이 남지 않을 만큼 많이 놀았다. 가자는 말에 조금의 미련도 없이 훌훌 털고 일어났다.
저녁에는 치킨을 먹기로 했다. 나름대로 자기 취향이라는 게 생겨서 소윤이는 푸라닭, 시윤이는 노랑통닭이 먹고 싶다고 했다. 엄마 없는 서글픔을 달래 주기 위해 둘 다 시켜서 먹을 생각이었다. 남으면 두고두고 내가 먹으면 되니까.
“아빠. 근데 누나가 말한 거 그거 뭐지? 아무튼 그거만 먹어도 돼여. 노랑통닭은 안 먹어도 돼여. 전 그것도 맛있어여”
시윤이가 먼저 이렇게 얘기를 했다. 치킨 한 마리에 튀긴 떡을 추가했다. 집에 가는 길에 들러서 찾았다. 서윤이가 잠들려고 하길래 소윤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소윤아. 서윤이 자려고 해. 잠 안 들게 좀 재밌게 해 줘 봐”
“아빠. 왜 자면 안 돼여?”
“그럼 밤에 너무 늦게 자니까”
소윤이는 능숙하게 ‘서윤이 잠 깨우기’ 레퍼토리를 꺼냈다. ‘곰 세 마리’도 부르고, ‘악어떼’도 부르고. 소윤이 덕분에 집까지 무사히 왔다. 잠들었으면 너무 슬펐을 거다.
오늘은 셋 다 너무 잘 먹어서 깜짝 놀랐다. 서윤이는 치킨보다 떡을 엄청 잘 먹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와, 너무 맛있다. 진짜”
“맨날 먹고 싶다”
라면서 사 준 보람이 가득 느껴지게 먹었다. 뼈도 어찌나 야무지게 발라 먹는지. 난 목 한 조각 먹었고, 네 조각이 남았다. 뿌듯했다. 서윤이가 기름 범벅이라 씻길 때 고생을 좀 했지만 그래도 흐뭇했다.
꽤 진행(퇴근까지의)이 빨랐다. 잘 준비를 마치고 자리에 누웠을 때 8시도 안 됐다. 셋 다 일찍 잠들기까지 했다. 거실에 나와서 딱히 한 건 없다. 그저 잉여롭게 소파에 붙어서 시간을 보냈을 뿐이지만, 그래도 늦게 나오는 것보다는 빨리 나오는 게 낫다.
아내는 재밌게 시간을 보내는 듯했다. 애들 치킨 먹는 걸 볼 때만큼이나 뿌듯했다. 뭘 하면서 놀았는지 듣는데 내가 다 기분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