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와 시키는대로 사이에서

21.11.15(월)

by 어깨아빠

서윤이는 장조림에 있는 고기도 안 먹는다고 했다. 고기도 모자라서 햄까지 골라낸다고 했다. 그냥 따로 놓인 고기를 안 먹는 게 아니라 밥에 비벼서 숨은 고기를 골라내는 거였다. 조금 더 적극적인 거부 의사다. 아직 두 돌도 안 된 주제에 비건의 삶을 살려고 그러나. 덕분에 맨밥만 잔뜩 먹고 있다.


퇴근했을 때 시윤이와 서윤이는 뭔가 자유로워 보였고 소윤이는 그렇지 않았다. 거실에 상을 펴고 앉아서 영어 교재를 보고 있었다. 소윤이의 얼굴에 드리운 뭔가 어두운 그림자가 무엇 때문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나도 소싯적에 많이 지었던 표정이었으니까.


소윤이는 영어 공부를 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영어 말하기 연습이었다. 자기가 정한 분량만큼 발음 연습을 해야 했는데, 아직 그걸 끝내지 못한 거였다. 소윤이는 아내에게 그만하면 안 되느냐고 물었고, 아내는 소윤이가 스스로 정한 거니까 알아서 결정하라고 했다. 원래 이런 게 더 곤란하다. 차라리 강압적으로 해라, 말아라 하면 편할 텐데 ‘알아서 결정’하라니.


이제 소윤이는 ‘알아서’ 해야 하는 기회가 더 많아질 거다. 일방적으로 결정해 주지도 않고 무작정 알아서 하도록 놔두지도 않고. 그야말로 운영의 묘가 필요한 순간이 많아지고 있다. 물론 이것 또한 나보다는 아내가 더 많이 접하게 될 거고.


“소윤아.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는지 아빠한테 보여준다는 생각으로 해 봐”


아내가 소윤이의 동기부여를 위해 나름의 수를 내었고, 소윤이는 다시 영어 단여를 읽기 시작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소윤이가 꽤 노력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발음의 정확성 유무는 둘째치고 굉장히 성실하게, 아내가 가르쳐 준대로 하기 위해 애를 썼다. 횟수를 채우기 위해 억지로 하는 건 아니었다. 물론 신나서 하는 것도 아니었겠지만 하기 싫어도 기본은 지켜가며 주어진 걸 소화하려는 게 기특했다. 이것 또한 ‘잠깐만 보기에 좋은 것만 보는’ 특권을 가진 나의 시선에서만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발음의 능숙함을 들으니 그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쌓아 왔다는 것도 느껴졌고. 기특했다.


“소윤아. 오늘은 어디 안 나갔지?”

“네”


저녁 먹고 씻기면서 물어봤다. 다들 어제 입고 잔 내복 차림 그대로길래 예상을 하고 물어봤다.


“소윤아. 오늘 책 누가 고를 차례지?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안 나지?”

“네. 맞아여”

“그럼 그냥 소윤이가 골라”


셋 모두 씻기고 나서 얘기했다.


“자, 책 골라. 오늘은 소윤이가 골라”

“아빠. 근데 오늘 제가 고를 차례 아니에여?”

“아, 책 읽은지가 좀 오래돼서 누구 차례인지 정확히 기억을 못 해. 아무도. 그러니까 그냥 오늘은 누나가 읽고 싶은 책 고르라고 했어 아빠가”

“아, 그래여?”


군대에서 몰래 초코파이를 챙겨 주는 이의 심정으로, 오늘은 은근하게 소윤이를 챙겼다.


소윤이는 적당한 분량의 책을 들고 왔다. 그러더니 다시 책장으로 가서 아주 긴, 읽는 데만 20분 이상이 소요되는 책을 슬쩍 집으며 날 쳐다봤다.


“아빠. 이것도 돼여?”

“어? 그거 읽고 싶어?”

“네”

“음, 그래. 알았어”


소윤이가 책장에서 책을 빼기 직전에 다시 말을 바꿨다.


“아, 근데 소윤아. 그건 아무래도 너무 길겠다. 내일 낮에 엄마한테 읽어달라고 하고, 오늘은 그냥 다른 거 읽자”

“알았어여”


다른 건 모르겠고, 그냥 오래 읽는 자체가 힘들 것 같았다. 너무 피곤하고 졸렸다. 책을 읽다가 수십 번도 더 졸 것 같았다. 책 다 읽고 아내와 아이들이 방으로 들어가고 나서 ‘잠깐 소파에 앉아서 쉬고 얼른 씻어야지’라고 생각한 게 한 시간을 눌러 앉았다.


월요일은 월요일이라 피곤하고 화요일은 겨우 화요일이라 피곤하고 수요일은 아직 수요일이라 피곤하고 목요일은 금요일이 남아서 피곤하고 금요일은 그동안 누적돼서 피곤하고 토요일은 주말인데 늦잠 못 자서 피곤하고 주일은 내일이 월요일이라 피곤하고.


아, K-직장인의 삶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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