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사지의 인라인스케이트

22.04.30(토)

by 어깨아빠

일어나서 아침 먹고 예배드리고 집 정리 좀 하고 준비해서 나가기. 글로 쓰면 한 줄도 안 되는 이 간단해 보이는 일이 실제로는 참 촘촘하게 느껴진다. 어제 금요일이라고 ‘다 내일로’ 미룬 덕분에 치워야 할 곳이 많았다. 설거지부터 시작해서 곳곳의 어수선함을 정돈하는 일까지. 잔뜩 쌓인 재활용 쓰레기를 분리하는 일도 꽤 오래 걸렸다. 큰마음 먹고 쇼핑하러 다녀오는 사람처럼, 양손 가득 분리된 재활용 쓰레기를 가지고 나왔다.


소윤이와 시윤이의 바람대로 장인어른과 장모님도 만나기로 했다. 처가 근처의 공원으로 바로 가려고 했는데, 먼저 점심을 먹자고 하셔서 식당으로 갔다. 시간이 딱 서윤이 낮잠 시간이었다. 가는 길에 차에서 잠들었는데, 도착해서 유모차에 옮기려고 하니까 바로 깼다. 30분도 못 잤다. 언제, 어디서 잠투정의 폭풍이 몰아칠지 모른다는 각오를 다졌다.


고기를 먹었다. 아침으로는 밥 대신 과일과 빵을 먹었는데 이게 꽤 든든했나 보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생각보다 점심을 많이 먹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정말 많이 안 먹은 건지 아니면 그렇게 보였던 것뿐’인지 모르겠다. 나와 아내, 서윤이가 한 식탁에 앉고 소윤이와 시윤이는 장모님, 장인어른과 같은 식탁에 앉았다. 불판을 각각 한 개씩 놓고 각 식탁에서 소비할 고기를 따로 구웠다. 덕분에 소윤이와 시윤이가 얼마나 어떻게 먹는지 자세히 보지 않았다. 평소에는 같은 식탁에 앉아서 굽고 먹으니까 먹는 양이 다 보인다.


장모님이 보시기에는 언제나 배고파 보이고 더 먹이고 싶은 손주들이다. 장모님은 계속


“소윤아, 시윤아. 너네 왜 이렇게 못 먹어”


라며 더 먹으라고 하셨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많이 먹어서 배가 부르다고 했다. 돌이켜 보면 시윤이는 마지막까지 숟가락을 놓지 않고 먹고 있었다. 진짜 얼마 안 먹은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서윤이는 고기는 안 먹고 청포묵만 계속 먹었다. 서너 번 더 채워 받은 걸 서윤이 혼자 거의 다 먹었다.


점심을 먹고 바로 공원으로 갔다. 나도 인라인스케이트를 가지고 왔다. 무료로 나눔 받았는데, 집에 와서 찾아보니 지금은 생산도 하지 않는 옛날 옛적의 브랜드였다. 그래도 뭐 소윤이 기분 맞춰 주려고 구한 거니 잘 굴러 가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받아 와서 발에 맞는지 신어 보지도 않다가 오늘 처음 신었다. 다행히 발은 들어갔다. 내 상상으로는, 곽윤기 선수처럼 쌩쌩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법 속도를 내며 앞으로 나아갈 줄 알았다. 현실은 아니었다. 속도는커녕 넘어지지나 않으면 다행일 정도의 형편없는 실력과 모습이었다. 난 내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사지가 그걸 증명했다. 넘어질까 봐 무서웠다. 혹시라도 허리를 다칠까 봐 더 무서웠다.


지난날, 소윤이에게 열정적으로 쏟아냈던 빈 수레 같은 요란한 조언이 머리를 스쳤다.


“소윤아. 괜찮아. 넘어져야 배우는 거야. 겁내지 않아도 돼”

“소윤아. 이렇게. 발을 이렇게. 팔은 이렇게 해야지”

“소윤아. 봐봐. 왼발하고 오른발을 이렇게 번갈아 가면서 앞으로 쭉쭉 밀어야지”

“소윤아. 괜찮다니까. 좀 넘어져도 돼”


뱉은 말처럼 실천하고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단 하나도. 처음 타 본 것도 아니고 학생일 때는 꽤 자주 탔는데, 이렇게나 몸의 기억이 깨끗하다는 게 당황스러웠다. 역시 사람은 그 입장에 처해 봐야 진정한 공감과 조언이 가능하다.


“소윤아. 아빠는 무서워서 못 타겠다”


한 10분 타고 벗었다. 당한 게 있으니(?) 그런 아빠의 모습을 보면, 통쾌하게 비웃으며 고소해 할 만도 한데, 소윤이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끊임없이 나를 걱정했다.


“아빠. 조심해여. 그러다 넘어진다여”

“아빠. 너무 빠르게 가려고 하지 마여. 허리 다쳐여”

“아빠. 천천히 가여”


소윤아. 아빠 빠르게 가고 싶어도 못 가. 아무튼 후일을 기약했다. 발에 맞는 걸 확인했다는 데 의의를 두기로 했다. 크기가 맞지는 않지만 아내도 한 번 타 봤는데 나보다 훨씬 잘 탔다. 더 안정적이었고 속도도 빨랐다. 내가 아니라 아내가 인라인스케이트를 구했어야 했다.


소윤이는 엄청 오랫동안 탔다. 정말 재밌나 보다. 시윤이는 자전거를 탔고, 서윤이는 킥보드를 탔다. 날이 흐리고 바람이 많이 불어서 생각보다 쌀쌀했다. 손주들이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하시는 장모님은 ‘이제 그만 들어가자’는 말을 자주 하셨는데, 소윤이는 계속 더 타겠다고 했다. 그때도 이미 꽤 오래 탄 뒤였다. 힘들다고 하면서도 끈기를 가지고 계속 탔다. 저번에 탔을 때보다 자세도 훨씬 자연스럽고 안정적이었다. 속도는 크게 빨라지지는 않았다.


장모님과 장인어른이 먼저 서윤이만 데리고 집으로 들어가셨다. 소윤이는 허리와 다리가 아프다고 하면서도 너무 재밌다고 했다. 할머니 집에 갈 때도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가면 안 되냐고 물어보길래, 그러라고 했다. 걸어서 10분 정도였다. 소윤이 혼자였으면 당연히 안 될 일이지만 내가 같이 가니까 괜찮았다. 시윤이는 우리와 함께 걸어가다가 중간에 아내의 차에 올라탔다.


“아, 아빠랑 데이트하고 싶다”


내 손을 잡고 등 뒤에서 쫓아오던 소윤이가 말했다. 나도 소윤이도 열심히 연습해서 둘이 머리를 흩날리며 쌩쌩 달리는 상상을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도착해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소윤이가 얘기했다.


“아빠. 할머니한테는 다리나 허리가 아프다는 말을 안 할 거에여”

“왜?”

“그럼 또 할머니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앉아서 좀 쉬라’고 할 거니까”

“그럼 좀 쉬면 되지”

“아, 안 돼여”

“그래도 그냥 아프면 아프다고 하면 되지”

“엄마랑 아빠가 알면 됐져 뭐”


뭐가 됐든 격렬한 운동을 하고 나면 찾아오는 근육과 뼈의 피로감이 있기 마련이다. 소윤이도 아마 그 정도였을 거다.


세 자녀를 장모님과 장인어른께 맡기고 아내와 나는 잠시 나왔다. 옷을 좀 사러(자의라기보다는 타의에 가까웠다) 나왔다. 쇼핑몰에 가서 이곳저곳 매장을 둘러보는데 마음에 들고 안 들고는 둘째 치고, 크게 의욕이 안 생겼다. 아내도 나도. 아이들이 없으니 엄청 자유롭고 여유로웠을 텐데 별로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여보. 너무 어색한데”

“맞아. 그게 딱이야. 애들 없어서 뭐 편하다 자유다 이런 게 아니라 그냥 뭔가 너무 어색해”


아무 소득 없이 이곳저곳 들락날락하다가 그냥 나왔다.


“여보. 가자. 나중에 다른 데 가서 사면 되지 뭐”


장모님 댁에 오면 자주 들르는 카페에 갔다.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무슨 노래인지 모르지만 왠지 ‘요즘 가로수길 카페에서 핫한 노래 100선’ 같은 분류에 있을 법한 노래가 흘렀다.


“드시고 가실 거죠?”

“아, 네”


카페에서 커피 맛에만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이 얼마 만이었는지. 상황은 좋았는데 아내의 상태는 썩 좋지 않았다. 생각보다 날씨가 추웠는데 옷차림은 너무 가벼워서 하루 종일 추위에 시달렸다. 게다가 요즘 꽃가루 때문인지 코로나 후유증 때문인지 비염 증세와 눈의 가려움이 엄청 심했다. 모든 상황에 기본으로 깔고 가는 만성 피로까지. 이제 데이트도 몸을 만들고 해야 하나.


점심을 워낙 든든히 먹어서 저녁 시간이 되어서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아내는 배가 고프다고 했다. 아내가 소화가 빨리 된 게 아니라 점심에 아내가 훨씬 조금 먹었을 거다. 저녁으로는 초밥을 먹었다. 나름대로 가벼운 음식을 고른 거다. 배가 고팠다던 아내보다 배가 불렀다던 내가 더 많이 먹은 것 같았다. 이런 상황이 어색하지는 않다. 초밥을 먹고 나서 카페를 한 번 더 갔다. 아내가 나와 꼭 가 보고 싶은 카페라면서 데리고 갔는데 정말 괜찮았다. 그 동네에 있기 아까운 카페였다. 우리 집에서 걸어갈 만한 거리에 그런 카페의 절반 만이라도 따라가는 카페가 없다는 게, 아내와 나에게 항상 큰 아쉬움이다.


난 계속 아내에게


“너무 늦은 거 아니야? 애들 괜찮으려나?”


라고 물었는데 아내는 괜찮다고 했다. 사실 엄청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세 명을 맡기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보니 죄송스러웠다. 소윤이 혼자 일 때처럼 염치는 엿장수에게 팔아먹은 듯 철판을 깔 상황이 아니었다. 아홉 시가 넘어서 장모님 댁으로 돌아왔다. 장모님과 장인어른은 아이들 저녁도 먹이고 목욕도 시키셨다고 했다. 놀고 온 건 아내와 나인데 우리가 더 피곤한 듯했다.


아내 말마따나 노는 것도 체력이 있어야 한다. 데이트하려면 그 전날 홍삼즙도 먹고, 비타민도 먹고, 영양제도 먹고, 잠도 일찌감치 자고, 일어나서도 너무 많은 체력을 쓰지 않고. 국가대표 급으로 체력 관리를 해야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