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마주친 그대와 매일 마주치는 그대

22.05.22(주일)

by 어깨아빠

“으아아악. 서윤아!!!”


아내의 비명 소리에 잠에서 깼다. 깜짝 놀라서 거실로 뛰쳐나갔다. 서윤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싶었는데 다행히(?) 그런 건 아니었다. 아내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보는 게 맞을 만한 상황이었다. 서윤이가 선크림을 온 얼굴과 몸에 범벅을 했다. 그 상황을 대하는 아내와 나의 온도 차이가 극명했다.


아내에게는 요즘 너무 잦게 벌어지는 일이었다. 자기 몸에만 바르면 그나마 다행인데 얼굴이나 몸은 물론이고 옷, 매트, 그 밖에 자기 손이 닿는 모든 곳에 처바르고 다녔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그런 일을 겪는 아내에게는 ‘막내의 귀여운 일탈’로 보일 리 만무하다. 물을 쏟는 것도 마찬가지다. 실수여도 반복되면 짜증이 나기 마련인데 요즘은 일부러 컵을 거꾸로 해서 쏟을 때도 많다고 했다. ‘막내의 귀여운 장난’ 정도로 보기 어려운 게 당연하다.


난 서윤이가 선크림으로 그 난리를 피우는 걸 오늘 처음 봤다. 아내는 수도 없이 본 일을 나는 처음 봤다. 그러니 나는 아내처럼 넌덜머리가 나지 않는 게 당연하다. 다시 말하면, 아내가 한숨을 푹푹 쉬며 짜증을 내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잠자코 아내의 뒷수습을 도왔다. 혹여 서윤이가 아내에게 혼이라도 나면 잠시 안겨서 마음을 달랠 수 있는 품만 제공하면 된다. 아내가 더 이상 어쩌지 못할 정도로 지쳐 있을 때는 내가 대신 악역(?)을 맡아도 되고.


서윤이는 오늘도 예배 끝자락에 잠들었다. 지난주부터 교회에서 밥을 먹는데 서윤이 유모차까지 가지고 갈 만한 공간은 안 된다. 유모차는 식당 입구에 세워 두고 아내 혼자 들어가서 줄을 서고 밥을 받았다. 그동안 나는 소윤이와 시윤이를 기다렸다. 소윤이가 먼저 내려왔다.


“소윤아. 엄마 식당에 있거든? 가서 엄마 좀 도와드려”


소윤이는 아무렇지 않게 식당으로 갔고, 나도 그런 소윤이가 든든했다. 소윤이가 이만큼이나 컸다. 시윤이는 근처에 있는 작은 공원으로 나가서 더 기다려야 했다. 시윤이가 엄청 환하게 웃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뛰어왔다. 굉장히 생소한 모습이었다. 보통 무덤덤하게 왔다 갔다 하고, 오늘은 어땠냐고 물어봐도 ‘그냥 똑같았어여’라고 심드렁하게 대답하는데 오늘은 뭔가 달랐다. 마치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났을 때처럼 신이 난 모습으로 왔다.


“시윤아. 명찰 선생님한테 드리고 인사하고 와”

“아빠. 명찰이 뭐에여?”

“이거. 시윤이 목에 걸고 있는 거”


시윤이는 아직 어리다. 명찰이 뭔지도 모를 만큼.


교회에서 먹는 밥은 엄청 맛있지만, 무척 정신이 없다. 국밥이라 괜히 더 그렇게 먹게 된다. 정신없이 먹고 있는데 아내가 서윤이 유모차로 뛰어갔다. 서윤이가 깼다. 서윤이도 합류해서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소윤이와 시윤이는 블럭을 하겠다고 했다. 서윤이도 같이 앉아서 했다. 아내와 나는 번갈아 가며 화장실에 들어갔다. 주말 육아를 할 때, 배가 아프면 합법적으로 ‘휴게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이 생긴다. 맹세코 거짓 입장을 한 적은 없다. 아주 작은 신호에 참지 않고 들어간 적은 있어도.


난 팝콘을 만들었다. 뭔가 군것질이 하고 싶었는데 마침 냉장고에 있던 팝콘 옥수수가 생각이 났다. 꽤 오랜만에 팝콘을 만들었다. 아이들과 바닥에 둘러앉아 한참 팝콘을 먹었다. 겉으로는 ‘너네를 위해서 아빠가 팝콘을 만들었지’ 였는데, 실상은 내가 제일 많이 퍼먹었다.


아내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한 숨 자러 들어갔다. 한 30분만 자고 일어나겠다면서 깨워 달라고 했다. 소파에 앉아 아이들이 블럭을 가지고 노는 걸 보다가 나도 잠들었다.


“어? 소윤아. 아빠 방금 코 골았어?”

“네. 엄청 크게”

“아, 그래?”


그렇게 정신없이 졸다가 축구하러 갈 시간이 되자 정신이 또렷해졌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미리 옷을 갈아입혔다. 오늘도 서윤이는 따라가겠다면서 현관에 나가서 신발을 신고 기다렸다.


“아니야. 서윤아. 언니랑 오빠만 가는 거야”

“나두 가고 지픈데에에”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끝까지 현관에 매달리던 서윤이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오늘도 아빠가 축구를 하는 동안 둘이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구르면서 잘 놀았다. 집에서는 그렇게 티격태격한다더니 밖에서는 통 그런 모습이 안 보인다. 지붕 없는 곳에서 얻는 넉넉함이라고 생각한다. 집에서 다투는 주된 이유는 서로의 ‘소유권’ 혹은 ‘유치권’을 주장하는 건데, 밖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어디를 둘러봐도 내 것은 없으니까.


둘 다 땀도 많이 흘리고 옷도 더러워졌다. 얼굴도 거뭇거뭇 해졌고. 오늘도 샤워를 해야 했다. 이제 그런 계절이다. 매일 샤워를 해야 하는 계절. 귀찮음이 고개를 들 때마다 나를 대입해 본다.


‘얼마나 찝찝할까’


축구장에 갔다 오는 동안 장모님, 장인어른이 왔다 가셨다고 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아니면 사 줄 사람이 없는 홍삼즙이 있었다. 일용할 저녁도 있었다. 아내와 서윤이는 장인어른, 장모님과 함께 먹었다고 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우리가 오기 전에 가셨고, 소윤이와 시윤이는 아주 조금 아쉬운 눈치였다. 미리 알았으면 축구장에 따라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덕분에 막내 손주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셨을 거다.


무엇보다 아내도 훨씬 힘이 덜 들었다고 했다. 육아 조력자가 소윤이나 시윤이와 함께 있을 때 오는 것과 서윤이와 함께 있을 때 오는 건 느낌이 많이 다르다. 서윤이와 함께 있을 때 누군가, 특히 1급 조력자(직계 존속)가 방문하면 체감 육아 노동의 강도는 절반 이하로 급감한다. 아내도 그렇다고 했다.


그래서였을까. 아내가 오늘은 나의 모닝 아니 이브닝콜을 받고 한 번에 깼다(아무리 덜 힘들었어도 잠들지 않는 건 불가능해졌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