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보다 나은 공감의 여왕

22.06.08(수)

by 어깨아빠

아직 사무실에 가지도 않고 차에 있을 때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가타부타 도입도 없이 바로 본론이었다.


“여보. 나 어떻게 해야 되지? 하아. 도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


아침부터 또 시윤이가 난리인 모양이었다. 아니, 아침부터가 아니라 눈을 뜨자마자였다. 배가 고프다면서 아내를 깨웠는데 아내가 조금만 더 누워 있다가 나가겠다고 했더니 그때부터 난리(라고 순화해서 썼다)를 피웠다고 했다. 아내는 쏟아내듯 자신의 상황과 감정을 나에게 얘기했다. 평소에도 내가 속 시원히 공감을 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때는 더 그랬다. 마음의 준비가 아예 안 되어 있었다. 너무 무방비 상태였다. 아내보다는 덜 하겠지만,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공간의 불화를 전해 들을 때마다 감정이 요동 치곤한다. 거기에 어제 소윤이가 어제 잘 때부터 살짝 열이 났는데, 아침에도 마찬가지였고 기운이 없었나 보다.


“아, 소윤이는 왜 또 열이 나지”


아내의 걱정 어린 말이 짜증처럼 들렸다. 감정의 파고를 잠재우지 못하고 결국 아내에게 차갑게 얘기했다. 뭘 당연한 걸 그렇게 짜증스럽게 얘기하냐는 듯, 짜증을 가득 담아서.


“왜 열이 나긴. 아픈가 보지. 아프니까 열이 나는 게 당연하지”


순간 아주 짧은 정적이 흘렀고, 통화는 끝났다. 아내가 짜증을 내거나 그러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상했다는 게 느껴졌다. 아니, 기분이 상한 게 아니었다. 남편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좌절감이었을까. 아무튼 나도 영 개운하지가 않았다. 왜 그걸 좀 더 들어주고 받아주지 못했는지. 후회스러웠다.


1시간 남짓 흐르고 아내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시윤이가 다시 괜찮아졌다는 얘기를 했다. 시윤이가 먼저 아내에게 와서 사과를 했다고 했다. 믿기지 않았지만 정말 그랬다고 했다. 아내가 진짜 괜찮아진 건지는 확신하기 어려웠다. 목소리는 여전히 힘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아내는 잠시 후에 메시지도 보냈다.


“배고픈데 엄마가 계속 안 일어나니까 너무 화가 났대요”

“정말 100% 시윤이의 자의로 와서 사과했어?”

“응. 할 만큼 다 하고 나니 와서 사과하더라고요. 아침에 내가 너무 마음이 상해서 전화했던 건데 감정적으로 행동한 거 같아 후회가 되네…! 우린 잘 지내고 있으니 너무 마음 무겁지 않게 지내길 바랄게요. 힘내고! 오늘 하루도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시길 기도해야겠다”

“내가 너무 들어주지 못해서 나도 미안하네”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떠나간 기차였다.


오후 내내 우리 가정의 현안(?)을 처리하느라 아내와 계속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아내가 노트북을 켜고 해야 할 일도 많았다. 한참 일을 처리하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애들은 뭐해. 여보가 이걸 할 정도로 애들이 협조적인가?”

“소윤이는 누워 있고 시윤이는 자동차, 서윤이는 저지레”


서윤이는 하루 종일 고집을 부린다고 했다. 소윤이는 오늘 먹은 게 고작 군고구마와 천도복숭아 정도라고 했다. 소윤이는 아프면 식욕이 사라진다. 그래서 더 기운도 없고. 열은 많이 안 나는데 기운이 없는지 계속 누워 있었다고 했다. 아내가 그 와중에 할 일을 처리하는 게 신기했다. 아내는 나의 취미생활까지 챙겼다.


“여보. 오늘 축구 가는 거 맞죠?”

“안 갈까 생각 중이야”

“왜 갔다 와. 몇 번 남지도 않았는데”

“여보의 ‘밝지 않음’에 나도 일조하는 듯해서 마음이 괴로워”

“그냥 오늘 좀 우울한 날이가 보다 생각해요. 나도 노력하는데 잘 안되네. 애들 저녁 일찍 먹일 테니 갔다 와요”


정말 안 갈 생각이었다. 더 얘기하면 아내가 계속 가라고 할 거 같아서 일부러 다른 얘기를 꺼냈다. 아내는 또 그 와중에 뜯어진 방충망도 고쳤다. 아내는 정말 내가 퇴근하기 전에 아이들 저녁을 다 먹였다.


“여보. 나 오늘은 진짜 안 갈 거야”

“아니 어차피 애들은 이제 재우기만 하면 되는데 뭐”


하긴 그렇긴 했다. 아내가 이미 저녁도 다 먹여서 축구하러 나가는 시간이 되기 전에 들어가서 누울 수 있는 상황이었다. 설거지를 했다. 무슨 설거지가 만병통치 약도 아닌데 죽으나 사나 설거지를 하는 스스로가 좀 웃기기도 했지만, 그래도 당장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시윤이가 읽고 싶어 하는 책도 읽어줬다. 다 읽으려면 15분 가까이 소요되는 긴 책이었다. 설거지도 하고 책도 읽었는데 시간이 남았다. 아내가 서둘러 아이들 저녁을 먹인 덕분이었다. 축구를 하러 가기로 했다. 아내와 아이들이 먼저 방에 들어가서 누웠다.


다행히 소윤이는 저녁에는 어느 정도 기운을 회복했다. 열은 하나도 없고 말투나 행동에서도 아픈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너무 못 먹어서 힘이 없었다. 숭늉이 먹고 싶다고 해서 아내가 숭늉을 끓여줬는데 아주 잘 먹었다. 그걸 먹고 나서는 한층 더 기운을 차렸다. 무언가 먹기 시작했다는 것과 말투에 힘과 웃음이 붙기 시작했다는 게 나아졌다는 증거였다.


축구를 하고 왔을 때 아내는 친구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 통화를 마치고 나서 아내는 나에게 얘기했다.


“여보. 00는 정말 공감의 여왕이야. 어떻게 이렇게 공감을 잘 할 수가 있지?”

“은사네 은사”


아내는 적잖이 위로를 받은 모양이었다. 다행이었다. 그런 친구가 있어서. 남편보다 나은 친구다. 축구도 하러 가기를 잘 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친구와 속 시원히 통화도 못 했을 텐데.


아무튼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