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을 했어도 무시무시한

22.06.17(금)

by 어깨아빠

아내가 정말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난다고 했다. 마침 나도 금요예배 반주 순번이 아니었다. 퇴근하고 집에 가서 아이들을 인수인계 받으면 그만큼 늦어지니까 내가 아내의 약속 장소에 바로 가기로 했다.


약속은 약속이고, 일상은 일상이다. 아내는 변함없이 처치홈스쿨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날이었다. 게다가 오후에는 숲에 가는 날이었다. 아내가 예상한 것보다 늦게 끝났다고 했다. 아내의 원래 계획은 집에 들러서 아이들을 다 씻기고 저녁도 먹이는 거였다. 아내는 조급했다.


“애들 땀 범벅이라 씻겨야 하는데”

“내가 씻기면 되지. 애들은 나한테 맡기고 여보나 신경 써서 나가길”

“여보 너무 힘들까 봐”

“괜찮아 불금이니까”


퇴근하기 전에 아내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또 시윤이와 일이 생겼는데 어찌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했다. 할 일은 많고 시간은 촉박한데 시윤이가 기분이 상했다고 하면서 전혀 협조도 안 하고 고집을 부린다고 했다. 시윤이를 무시하고 준비를 하자니 시윤이와의 관계가 생각나고, 그렇다고 약속을 무시하자니 그건 그것대로 말이 안 되고. 진퇴양난이었다. 시윤이를 바꿔 달라고 했다. 해와 바람의 대결에서 승리한 해의 전략을 차용했다.


시윤이에게 뭐가 속상했는지 얼마나 속상했는지 물어보고 다 들었다. 연기에 가까웠지만, 최대한 하이퍼 리얼리즘을 살려서 깊이 공감했다. 그러고 나서 속상한 이유와 그 마음을 푸는 대상이 다른 건 잘못된 거라고 했다. 누나 때문에 속상한 건데 엄마에게 푸는 건 바르지 않은 일이라는 의미였다.


“엄마한테 그러는 건 아니에여”

“근데 시윤이가 지금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 고집 부리고 엄마를 힘들게 하고 있잖아. 엄마는 얼른 준비하고 나가셔야 되는데 시윤이 때문에 준비도 못하고”


시윤이는 인정했다. 공감도 했지만, 잘못도 짚어줬다. 통화를 끊고 나면 엄마에게 가서 사과도 드리라고 했다. 그것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시윤아. 그래도 아빠한테 얘기하니까 조금 풀리기도 했지?”

“네”

“그래. 그러니까 조금 속상한 건 잊고 일단 엄마 잘 도와드려. 알았지? 조금 이따가 아빠 만나서 또 얘기하고. 알았지?”

“네”


다행히 그 뒤로는 매우 협조적이었다고 했다. 먼저 아내에게 가서 쭈뼛쭈뼛 죄송하다는 말도 했고. 퇴근하면서 다시 아내에게 전화를 했을 때는 소윤이가 받았다.


“아빠. 엄마 지금 씻고 계셔여”

“아 그래?”

“왜 전화했어여?”

“아, 엄마랑 통화 좀 해야 되서 그랬지. 소윤이는 뭐해?”

“우리는 지금 저녁 먹고 있어여. 제가 동생들 먹여주고 있어여. 주먹밥 만들어서”

“아, 진짜? 소윤이가 수고하고 있네?”


정신없이 씻고 준비할 아내의 정신없는 모습과 동시에 어느새 엄마와 아빠의 믿을 만한 구석이 되어 동생들을 ‘제대로’ 챙기는 소윤이의 모습이 그려졌다.


아내가 태우고 가기로 한 아내 친구의 아파트 주차장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만났다. 아내는 그 정신없고 바쁜 와중에도 시윤이와 서윤이는 씻겼다고 했다. 다소 초인적인 소화력이었다. 덕분에 내 일이 크게 줄었다. 아내하고는 거기서 헤어졌다. 아내는 친구를 태우고 약속 장소로 가고 난 아이들과 함께 집으로 왔다.


“아빠. 우리 바로 집으로 가는 거에여?”

“어, 그래야지”

“어디라도 잠깐 가고 싶다”


진짜 깊은 고민을 했다. 아이들에게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금요일이고 애들 밥도 먹었으니 잠깐 바람이라도 쐴까 싶었는데, 그냥 집으로 왔다. 너무 피곤했고 퇴근이 간절했다. 내일 주말이니까 오늘의 아쉬움은 내일 채워주기로 다짐하면서. 서윤이는 또 아빠 차를 탔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소윤아. 혼자 씻을래 아니면 아빠가 씻겨줄까?”

“그럼 혼자 씻을게여”

“아빠가 씻겨줘도 돼. 아빠는 소윤이가 혹시 혼자 씻고 싶으면 그러라고 물어본 거야”

“네. 혼자 씻을게여”


소윤이는 혼자 들어가서 머리도 감고 샤워도 했다. 꽤 한참 걸렸다. 구석구석 꼼꼼하게 씻어야 한다고 하도 얘기를 해서 그런지 정말 오래 씻었다. 그래도 아내가 밥도 먹이고 시윤이와 서윤이는 씻긴 덕분에 할 일이 많지는 않았다.


다만 집이 폭탄을 맞은 듯했다. 오늘 하루, 아내가 얼마나 바쁘게 살았는지 보여 주는 현장이었다. 아내는 중간에 전화해서, 너무 정신이 없어서 집을 못 치우고 나왔다면서 집은 그대로 두라고 했다. 알겠다고 대답했다. 반반이었다. 진짜 그럴 생각이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고.


설거지도 많았다. 아이들을 재우고 나와서 일단 밥부터 먹었다. 배가 너무 고팠다. 아내가 서윤이 먹이려고 만들었던 주먹밥을 꺼내서 우걱우걱 먹었다. 그 다음에는 비빔면을 먹었다. 싱크대 앞 바닥에 앉아서 후루루루룩 넘겼다. 품위고 기분이고 모양이고 다 필요 없었다. 주린 배를 얼른 채워야 했다.


다 먹고 나서는 설거지부터 했다. 그러고 나서는 집을 정리했다. 현관부터 베란다까지 차례대로. 빨래도 돌렸다. 빨래가 얼마나 많았는지 한 번에 다 못 넣을 정도였다. 건조기에 있는 빨래와 보자기에 쌓여 있던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감춰 놨던) 빨래를 갰다. 스스로 자처한 일이고 애초에 짜증이 동기가 되어 시작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괜찮았다. 다만 몸이 힘들긴 했다. 퇴근이 고팠고. 아이들을 재우고 8시 30분 정도에 나와서 시작한 집안일은 11시 30분이 다 되어서야 끝났다.


예상은 했지만 어마어마한 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