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6.18(토)
밥이 없었다. 빵도 없었고. 계란도 없었다. 이도 없고 잇몸도 없는 상태랄까. 소윤이는 프렌치토스트가 먹고 싶다고 했다. 그 시간에 문을 연 곳 중에 계란을 파는 곳이 없었다. 편의점에서도 계란을 파는지 안 파는지 모르겠다. 전화해서 확인해 보려고 했는데 전화를 안 받았다.
아내가 아이들과 함께 나가서 편의점에 가 보고 없으면 빵이라도 사 오겠다고 했다. 그러다 아내가 갑작스럽게 아침 산책을 제안했다. 난 가장 마지막까지 방에 누워 있었다. 아내는 그냥 가볍게 제안한 것이니 피곤하면 그냥 쉬라고 했다.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을 한다는 건 아니었고, 만약 내가 함께하지 않으면 딱 필요한 것만 사서 돌아오겠다는 말이었다.
“아니야. 가자. 나도 좋아”
아이들은 내복 차림으로, 나와 아내도 누추한 몰골로 집에서 나왔다. 역시나 아침 공기는 상쾌했다. 빵집에 들러서 각자 먹고 싶은 빵을 하나씩 샀다. 나올 때 커피를 내려서 텀블러에 담아 왔는데 이게 신의 한 수였다. 아침 산책의 완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사실 산책이랄 건 없었다. 빵집에 들러서 빵 사고, 곧장 단지 안으로 들어왔다. 그 시간에는 돌아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놀이터 의자에 앉아서 빵과 우유, 커피를 먹었다.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놀았다. 꽤 오래 있었다. 집에 돌아오니 점심시간이 얼마 안 남았을 정도로.
“여보. 엄마, 아빠 시간 되신다고 하면 김밥 재료 사 가서 같이 김밥 싸 먹고 올까? 그냥 급제안이야”
오늘 무슨 급제안의 날인가. 아내는 아이들이 모르게, 메시지로 나의 의사를 물었다. 그러기로 했다. 아직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일정을 여쭤보지도 않았는데 잠정적으로 그러기로 했다. 아내는 얼마 전부터 김밥을 싸 먹고 싶다고 했다. 김밥이 별 거 아닌 거 같아도 우리처럼 입이 많으면 생각보다 양이 많아진다. 더군다나 그저 싸서 ‘먹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싸는’ 것에 무게를 두면, 아이들도 함께 해야 한다. 아내가 원하는 것도 그거였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모든 일은 지나고 나면 다 추억이고 소중하지만, 그 순간을 지날 때는 꽤 고난의 여정일 때도 많다. 김밥 싸는 일도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니 장모님과 장인어른에게 가자고 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우리끼리 하면 엄두가 안 나지만, 두 분이 함께 하면 엄두가 나서.
장인어른과 장모님도 시간이 되신다고 하셨다. 서둘러서 나온다고 나왔는데 아주 늦은 오후였다. 형님(아내 오빠)의 아들도 있었다. 형님은 잠깐 머리를 자르러 가셨고 조카는 장인어른이 안고 계셨다. 특유의 순한 얼굴로 할아버지 품에 앉아 있는 조카에게 반갑게 다가가서 인사를 했다. 조카(형님 아들)는 날 보고 오열했다. 지난 번에 내 동생 딸도 그러더니 여기도 그러네. 내 동생 딸이 그럴 때는 ‘여자 애들이 남자 어른을 무서워하긴 하더라’는 핑계를 댔는데, 오늘은 아들이었는데도 똑같았다. 성별과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 자체가 위압 아니 위협감을 주는 모습인가 보다.
때 아닌 김밥 사태로 장모님과 장인어른이 분주하셨다. 계란 지단도 만드시고, 각종 재료를 볶느라 정신이 없으셨다. 이건 마치, 우리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 부모님의 집과 체력을 이용하는 모습이었다. 물론 실제로는 전혀 아니었지만, 상황은 그랬다. 아내와 장모님이 김밥을 싸고 난 썰었다. 소윤이와 시윤이에게도 김밥을 싸 보라고 했다. 소윤이는 신이 나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재료가 모두 소진될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앉아서 열심히 쌌다. 시윤이는 채 한 줄을 다 못 싸고 일어섰다.
“아빠. 저는 안 할래여. 재미없어여”
다들 김밥을 많이 먹었다. 상을 펴긴 했는데 거기 앉아서 먹고 말고 할 틈도 없었다. 싸면서 이미 다 배를 채웠다.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도 엄청 잘 먹고 많이 먹었다. 소윤이가 웬만해서는 그런 말을 안 하는데
“으아. 너무 배불러여. 배가 터질 거 같아여”
라고 얘기했다. 어쨌든 장모님과 장인어른 덕분에, 우리끼리였다면 몇 배는 더 피곤하고 힘들었을 김밥 싸서 먹기를 무사히 마쳤다. 배를 채우고 나니 피곤이 몰려왔다. 이 근의 공식 같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흐름이란.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는 모두 장모님이 씻겨 주셨다. 서윤이는 조용히 작은방에 들어가서 칠판에 펜을 그리며 놀았다(난 보지 못했지만 소윤이와 시윤이가 그렇게 얘기했다). 방에서 나온 서윤이의 티셔츠와 바지에는 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아내는 이제 이런 일을 만나도 그저 처연하다. 옛날꽃날처럼 바로 얼룩을 제거하고 그러지 않는다.
아내와 나는 말할 것도 없고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도 무척 피곤해 했다. 다 잠들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깨워야 했다. 방법이 없다. 둘을 한꺼번에는 물론이고 각각 안는 것도 이제는 너무 버거운 일이 됐다. 서윤이만 깨우지 않고 그대로 방에 눕혔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서윤이가 잠든 걸 아쉬워했다. 아내가 함께 들어가지 않으니까. 그래도 하루 종일 웃고 즐겁기만 해서 괜찮았을 거다(아, 아침에 나한테 살짝 혼나기도 했다). 장모님 댁에 가서 오히려 시윤이와 더 많이 놀았다. 공놀이도 하고 퍼즐도 하고.
“아우, 여보. 오늘 왜 이렇게 피곤하지. 우리 한 것도 없는데”
“그러니까. 고생은 장모님하고 장인어른이 다 했는데”
생각해 보니 이유가 있었다
“아, 여보. 우리 아침부터 산책했네. 그게 힘들었나 보네”
“아 맞네. 맞아. 그게 무시 못 하지”
그랬구나. 이불에서 뒹굴지 않고 부지런 떨어서 나가길 정말 잘 했을 정도로 좋은 시간이긴 했지만, 피곤하긴 피곤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