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6.19(주일)
잠이 깬 듯 만 듯 방에 누워 있었다. 갑자기 아내가 비명을 지르면서 거실로 뛰어나갔다. 나도 잠이 확 깨서 아내를 따라 나갔다. 아내가 서윤이 이름을 부르면서 나갔기 때문에 무슨 일인가 싶었고, 엄청 깜짝 놀랐다.
서윤이는 식탁에 있던 선크림과 로션을 열어서 온 몸에 바르고 있었다. 발랐다는 표현 보다는 ‘범벅’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다. 다행이었다. 엄청 큰 일이 난 줄 알았다. 난 다행이었는데 아내는 아니었나 보다. 아내의 뒷모습에서 깊은 분노가 느껴졌다. 팔과 다리는 물론이고 얼굴까지 선크림으로 범벅을 한 서윤이는 눈치를 살살 살피면서, 날 보고 웃고 괜히 더 발랄하게 얘기를 하고 그랬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자 앞에 놓인 어린 토끼였다. 서윤이 처지가.
처음도 아니고 이미 여러 차례 이런 만행(?)을 저질렀고, 아내는 그 경험 아니 그 분노가 누적되었을 거다. 그러니 당연히 나와는 입장이 다를 것이고. 아내가 간신히 분노를 억누르는 동안 난 서윤이를 구제했다. 언어는 훈계지만, 온도는 위로에 가까운 말을 하며 서윤이를 안고 화장실로 갔다. 옷과 기저귀를 모두 벗기고 물로 싹 씻겼다. 다행히 바른지 얼마 안 돼서 잘 씻겨 나갔다. 영악한 막내 서윤이가, 어찌나 고분고분 말을 잘 듣고 애교를 부리던지. 내가 서윤이를 씻기는 동안 아내는 바닥에 묻은 선크림을 닦았다. 아마 내가 없었으면 서윤이는 물론이고 오늘 아침의 분위기 자체가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어제 싸 가지고 온 남은 김밥에 계란을 입혀서 부쳐줬다. 계란국도 싸 주셔서 그것도 함께 먹였다. 바쁘고 정신없는 주일 아침의 귀하고 소중한 양식이었다. 심지어 아이들도 엄청 맛있게 먹었다. 특별식을 먹는 기분으로.
서윤이는 엄청 일찍 일어났다. 선크림 사건을 저지르기 훨씬 전부터 일어나서 종알대기도 하고 부스럭거리기도 하고 그랬다. 예배 드릴 때 좀 일찍 잠들겠거니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거의 잠들 것처럼 눈이 감겼었는데 갑자기 번쩍 눈을 뜨고 그랬다. 누가 가족 아니랄까 봐 언니와 똑같다. 결국 예배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서야 잠들었다.
교회 청년부에서 비전트립 비용 마련을 위한 바자회를 여느라 식당 운영이 없었다. 대신 청년부를 돕는 마음으로 바자회 먹거리를 사 먹으려고 했다. 아이들에게 먹일 게 마땅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떡볶이를 잘 먹으면 그나마 떡볶이라도 주면 됐는데, 아직은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너무 매운 음식이다. 어쩔 수 없이 밖에 나가서 먹기로 했다.
교회 식당 운영이 재개되기 전에 매주 가던 칼국수 가게를 오랜만에 갔다. 역시나 맛있었다. 서윤이는 여기서도 계속 잤다.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안 깼다. 깨워서 먹여야 하나 아니면 일단 차에 태우고 집이든 교회든 가서 먹여야 하나 고민하다가, 일단 차에 태우기로 하고 자리를 정리하는데 서윤이가 깼다. 그래도 일단 차에 태우기로 했다. 서윤이 하나 먹이자고 더 앉아 있기도 민망했다.
다시 교회로 갔다. 서윤이를 먹여야 하기도 했고 뭐라도 사서 조금이나마 보태고 싶기도 했다. 이제 아이들 배는 채웠으니 간단한 간식거리가 있으면 좀 사려고 했는데, 이미 재료가 소진돼서 품절(?)된 게 많았다. 수박, 감자빵, 아이스티 정도가 그나마 먹일 만한 것이었다. 서윤이는 미리 싸 놓은 돈까스와 만두, 소윤이와 시윤이는 바자회 간식거리를 먹었고 아내와 나는 커피를 마셨다. 서윤이는 의외로 남김없이 다 먹었다.
그러고 나서 집에 오니 평소보다 많이 늦은 시간이었다. 소윤이는 축구장에 안 가고 집에 있고 싶다고 했다. 덥기도 하고 이제 슬슬 재미가 없나 보다. 어디가 됐든 밖에 나간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울 만한 나이가 지났나 보다. 나야 상관이 없었지만 아내가 걱정이었다. 시윤이는 누나가 안 간다고 하면 자기도 안 가겠다고 할 게 뻔했다. 사실 따라 간다고 해도 집에 두고 가야 했다. 혼자 가면 너무 심심하다. 아무튼 시윤이가 집에 남게 되면 주말까지 아내에게 ‘시윤이와의 시간’을 선사하는 셈이라, 그게 마음에 걸렸다.
“소윤아. 그냥 아빠랑 같이 축구장 가자”
소윤이도 ‘너무 가기 싫다’ 정도는 아니었고, 좀 귀찮고 내키지 않는다는 정도여서 가겠다고 하긴 했다. 혼자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싫다는 걸 억지로 끌고 가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선택하도록 했다. 역시나 소윤이가 안 가겠다고 하니까 시윤이도 안 가겠다고 했다. 그렇게 하기로 했다. 서윤이는 옆에서
“나는 아빠양 가티 가고 지픈데에에”
라면서 계속 나를 따라가겠다고 했다. 아직 몇 년은 더 있어야 할 텐데.
소윤이와 시윤이는 막상 갈 시간이 되니 고민이 되는지, 따라나서겠다고 마음을 바꿨다가 다시 집에 남겠다고 하고, 다시 따라가겠다고 하고 그랬다. 그럼 그냥 같이 가자고 했더니, 옆에서 아내가 자기는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결국 소윤이와 시윤이는 집에 있기로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엄마 말씀 잘 듣고, 특히 시윤이에게는 짜증 내지 말고 못된 말이나 행동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로 해결(?)될 일이었으면 진작에 끝났을 거다. 그래도 혹시나 아빠(나)의 말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을지도 모르니, 강조해서 얘기했다.
“시윤아. 엄마 말씀 잘 듣고 속상하고 짜증 난다고 엄마한테 못되게 하지 말고”
다른 날에 비해 유독 마음이 편치 않아서 축구장에 가서도 한 번 더 전화를 했는데 받지 않았다. 중간에 아내에게 전화가 왔는데 그건 내가 못 받았다. 결국 축구를 끝내고 나서야 연락이 닿았다.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쇼핑몰에 갔다고 했다. 살 게 있어서 교회에서 오는 길에 다 함께 들를까 하다가 시간이 촉박해서 다음으로 미뤘는데, 아내가 혼자 세 녀석을 데리고 간 거다. 통화할 때는, 이제 막 돌아가려던 참이었다고 했다.
내가 한참 먼저 집에 도착했다. 샤워하고 나서도 꽤 오랫동안 소파에 앉아서 쉬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생각보다 늦게 왔다. 아내가 주차장으로 내려와 달라고 전화를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다퉈서 둘 다 기분이 안 좋았다. 귀여운 다툼 정도로 넘어갈 수준은 아니었다. 서로 사과를 안 하겠다며 버티다가 소윤이가 먼저 사과를 하긴 했지만, 시윤이가 자기는 받을 생각도 없고 할 생각도 없다며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자초지종을 들어 보니 시윤이도 쌓인 게 있었다. 시윤이도 먼저 사과를 했는데 그때는 소윤이의 태도에 너무 빈정이 상했던 거다. 제멋대로 엉킨 실타래 같았다. 서로의 잘못과 사과가 얼키고 설켜서 자존심을 세우고 있었다. 그나마 소윤이는 마지막으로 먼저 진심으로 사과를 하긴 했는데 시윤이가 안 받아주고 있었다.
아내와 서윤이는 먼저 집으로 올라가고 난 소윤이, 시윤이와 주차장에 남았다. 짜증도 나고 속이 상했다. ‘그렇게 얘기했는데 결국 또’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여덟 살, 여섯 살밖에 안 된 자녀들이니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열을 내서 훈계를 하고 시윤이가 소윤이에게 사과하는 걸 기다리다가 일단 집으로 올라왔다. 집에 와서도 한 차례 더 얘기를 하고 둘이 방에 들어가서 해결하고 나오라고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니 방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왜 웃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서로 쌓인 감정을 푸는 것 같긴 했다. 잠시 후 둘이 나오더니 사과를 했다고 했다. 표정이나 말투를 보니 다 푼 듯했다. 더 이상 물어보지 않고 다음 일정(저녁 식사)을 진행했다. 시간이 늦은 만큼 비빔밥을 만들어서 한 숟가락씩 넣어줬다.
오랜만에, 아내가 집에 있는데도 내가 아이들을 재웠다. 서윤이가 처음에는 엄마와 자겠다고 하다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순순히 아빠와 자겠다고 했다.
“아빠아. 그여면 나는 찜대에 눕구우 아빠는 제 옆에 누어여어”
아내는 자기가 재워도 괜찮다고 했지만 내가 재웠다. 아내와 나는 저녁으로 떡볶이를 만들어서 먹기로 했는데 약간 그게 귀찮았던 것 같기도 하다. 대놓고 귀찮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지만 무의식의 흐름 속에 피한 게 아닌가 싶다. 아무튼 내가 아이들과 함께 방에 들어갔다. 서윤이는 눕자마자 손가락 몇 번 빨고는 잠들었다. 시윤이도 마찬가지였고. 오늘도 소윤이만 깨서 나가는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래도 요즘에는 울고 그러지는 않는다. 물론 속마음은 무척 아쉽겠지만.
덕분에 아내가 만든 떡볶이를 받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