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 주기 전에 약 주기

22.07.20(수)

by 어깨아빠

오늘도 일찍, 출근할 때 일어나던 시간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출근할 때처럼 파바박 반응하며 몸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깼다. 살짝 눈을 다시 붙였다가 금방 일어났다. 오늘도 아침에 해야 할 일을 미리 다 해 놨다. 모처럼 얻은 자유의 시간에 잠을 더 못 자는 게 억울하지는 않았다. 나의 존재로 아내의 심신이 평안하다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 맛(?)에 아침에 늘어지지 않고 있다.


오늘은 (내) 엄마네 집에 가기로 했다. 아내는 목장 모임이 있어서 따로 가기로 했다. 가는 길에 아내를 교회에 내려줬다. 동생 집에 들러서 동생과 조카도 태워서 갔다. 아내는 원래 점심시간에 맞춰서 오려고 했는데 모임이 좀 늦어져서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아내와 아이들이 좋아하는 (나는 말하면 입 아픈) 고깃집에 가려고 했던 건데 아내는 못 가게 됐다. 나와 아이들, 동생과 조카, 엄마만 가서 먹었다.


소윤이와 시윤이에게는 굉장히 신나는 시간이었다. 할머니, 고모는 물론이고 요즘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조카까지 함께 한 데다가 엄청 좋아하는 고깃집이라니. 시윤이는 엄청 까불었다. 그저 신나서 기분이 좋았다. 엄청 깐족댔지만 적당한 수준이었다. 까불거리다가도 말을 하면 바로 멈추기는 했다. 곧 흐트러져서 그렇지. 엄마와 동생은 시윤이의 모습을 보고 이렇게 얘기했다.


“아유. 가영이가 편하겠네. 아빠가 있으니까 다르네. 말 엄청 잘 듣네”


가끔 아내와 나 없이 할머니, 할아버지하고 시간을 보낼 때 어땠는지 짐작이 가능한 대목이었다.


소윤이는 내내 시무룩했다. TV가 켜져 있었는데 거기에 뭐가 나오는지 제대로 보지도 않고 그저 TV가 켜져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섭다며 울려고 했다. 또 순간적으로 짜증이 올라 오려고 했지만 잘 참고 설명해 줬다.


“소윤아. 지금 TV에 무서운 거 하나도 안 나와. 뭐가 나오는지도 안 보고 무조건 그러면 어떡해”

“아빠. 그래도 갑자기 나올까 봐 무서워여”

“그럼 소윤이가 TV 등지고 앉아. 안 보면 되잖아. 소리도 안 드리는데 왜그래”


이런 게 왜 그렇게 선공감이 안 되는지. TV를 등지고 앉고 나서도 똑같았다. 오히려 자기가 자꾸 고개를 돌려서 뭐가 나오는지 확인했다. 그래도 잘 참았다. 대신 모르는 체했다. 내심 자기가 알아서 이런 상황을 극복해 보길 바랐다. 어디서든 자기가 원하는 대로 TV를 끌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결국 나중에는 (내) 엄마가 슬쩍 가서 TV를 껐다. 이게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는 건지 묘안을 고안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내는 우리가 다 먹고 일어서려고 할 때쯤 근처에 왔다고 했다. 아내는 바로 엄마 집으로 갔고, 아내 몫으로 고기 2인분을 포장해서 갔다. 그 뒤로는 푹 쉬었다.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잘 놀기도 했고, 내가 아니어도 봐 줄 사람이 많았다. 그것도 할머니와 고모였으니 올스타급이었다.


낮잠이 늦어진 서윤이는 아내가 데리고 들어가서 재웠다. 아내가 서윤이를 재운 건지 서윤이가 아내를 재운 건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둘 다 빠르게 잠들었다. 난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나도 스르르 잠들었다. 스르르라고 하기에는 코를 너무 많이 골기는 했다. 회사에 안 가도 오후의 복판이 되면 졸린 건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일을 가야 했고, 동생은 조카를 재워야 했고, 난 축구하러 가야 했다. 딱 오후 몇 시간을 보내고 다시 헤어져야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아쉬운 티를 팍팍 냈다. 그러고 보니 떠나기 전에는 마지막으로 만남이었다. 특히 동생과 조카는 꽤 한참 동안 못 볼 가능성이 컸다. 요즘 할머니나 할아버지보다 조카들 보는 걸 더 원하는 소윤이에게는 꽤 아쉬운 일이긴 했다.


엄마는 일하는 곳에, 동생과 조카는 다시 자기 집으로 데려다 주고 돌아왔다. 시윤이는 오는 길에, 그러니까 밤잠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한 시간에 잠들었다. 소윤이와 흥겹게 웃고 떠들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곯아떨어졌다.


축구하러 가기 전까지 한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아이들 저녁으로 계란밥을 먹였다. 물론 내가 만들어 줬다. 밥을 하는 동안 소윤이와 시윤이는 양치를 제외한, 취침 전 필수 세안 과정을 모두 마치도록 했다. 이곳에서 축구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아무리 마지막이라고 해도 아이 셋을 아내에게 맡기고 떠나는 건 언제 미안하다. 아내에게 보답하는 유일한 길은 아내가 최대한 빨리 퇴근할 수 있도록 돕는 거다. 내팽개치고 나가면서 돕는다는 게 성립 가능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병 주기 전에 약 주기인가.


예상대로 시윤이가 엄청 늦게 잤다고 했다. 시윤이는 꼭 잠들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지만, 기다리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아내가 먼저 잠들었을 거다. 축구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만난 아내의 눈은, 벌겋게 충혈이 된 상태였다.


그래도 내일 아침도 내가 담당할 거니까 부담이 좀 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