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9.08(토)
아내는 나에게 새벽기도 다녀오면 한 숨 자라고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자는 게 뭔가 아까웠다. 아내가 애들이랑 들어가서 자는 동안 거실에 남아 커피도 마시고 머핀도 먹고 소파에 누워서 동영상도 보고 여유를 즐기기는 했는데, 너무 졸려서 자꾸 눈이 감겼다. '차라리 잘 걸 그랬나' 하고 있는데 아내가 깨서 먼저 나왔다. 그때쯤 일기 좀 쓰려고 노트북을 막 켠 상태였다. 아내랑 얘기를 나누다가 다툼이 일어났다. 가벼운 불꽃보다는 훨씬 진행이 되서 점점 큰 불길로 번지고 있는데 때마침 방 안에서 시윤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시윤이 덕분에 불길은 진압됐지만 열기는 그대로였다. 노트북을 덮고 아직 소윤이가 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가 누워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소윤이도 얼마 안 되어서 깼다.
'애들한테는 화풀이하지 말아야지'
아내랑 싸우고 나면 희한한 현상이 하나 생기는데 애들이 말하거나 행동하는 게 꼭 아내가 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현상. 이건 아마 아내도 마찬가지일거다. 일단 마음이 작아져 있는 상태에서는 애들이 무슨 말이나 행동을 해도 다정하게 받아주기가 어렵다 보니 퉁명스러운 반응을 하게 되는데 애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억울하겠나.
'애들이랑 싸운 게 아니지, 아내랑 싸웠지'
어쨌든 그런 찜찜한 상태로 신림동으로 출발했다. 꼭 필요한 말 말고는 굳이 더 보태지 않는 침묵의 상태로 이동했다. 신림동에 도착해서는 어쩔 수 없이 조금 완화되었다. 부모님 앞에서 이런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건 아내도 나도 원하지 않는다. 또 그냥 이렇게 저렇게 어영부영 끝내고 원래대로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었다. 시윤이 때문에 결론 내지 못했지만 결론이 날 수 있나 싶기도 했고. 다시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마음속에 계속 걸리는 건 우리가 신림동에 온 이유였다.
친구 기원이랑 야구를 보러 가기로 했고 아내는 혼자 애들을 보느니 차라리 신림동에 가서 어머님, 아버님이랑
함께 있겠다고 했다. 친정이 아닌 시댁인 이유는 신림동이 잠실하고 더 가까우니까. 아내와 다투고 완벽히 풀지 못한 상황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시댁에 남겨두고 친구랑 야구 보러 가는 남편이 된 것 같아 자꾸 걸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내가 뭘 잘못했나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소윤이랑 시윤이는 엄청 신나 가지고 잘 놀았다. 소윤이야 그렇다 쳐도 시윤이까지 덩달아 흥분해서 계속 깔깔대고 소리 지르고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놀았다. 시윤이는 할아버지를 잘 따른다. 신림동 할아버지든 파주 할아버지든 자기 누나는 꽤 오랫동안 할아버지들을 외면하며 안아 보지도 못하게 해서 할아버지들이 적잖이 섭섭했는데, 시윤이는 완전히 다르다. 오히려 할아버지를 더 따르는 것 같다. 뭐지. 남자애라 그런가. 아니면 둘째 본능인가.
아무튼 시간이 됐고 일단 애들은 잘 놀고 있으니 불편한 마음은 접어 두고 야구장에 가기 위해 아내와 아이들을 남겨두고 집에서 나왔다. 와, 날씨도 엄청 선선한 데다가 바람까지 살랑살랑 부는데 탁 트인 야구장에 앉아 있으니 모든 스트레스가 다 날아갔다. 거기에 경기도 이기고. 진짜 조금만 더 가까웠으면 수시로 왔을 텐데, 아쉽다. 평소보다 빠른 5시 경기인 데다가 경기도 엄청 빠르게 진행된 덕분에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같이 간 기원이도 나오기 전 아내랑 좀 다퉜다면서 들어가면 사과해야겠다고 했다.
원래 (다투기 전부터) 신림동에 가면 애들 재워 놓고 나와서 심야 영화라도 볼까 했었다. 아내에게 전화해봤더니 이제 애들 씻기고 재우려고 한다며 시간 맞는 거 있으면 보자고 했다. 잠시 후 다시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애들 재우신대"
애들은 엄마 아빠에게 맡기고 아내는 바로 나왔다. 신림역 롯데시네마에서 공작을 봤다. 영화 보고 나서는 그냥 들어가기 아쉬우니 야식이라도 먹고 들어가자고 꼬셔서 녹두거리에 있는 전 집에서 파전을 먹었다. 싸움의 계기가 됐던 이야기는 다시 꺼내지 않았지만 그냥 다른 얘기 좀 하면서 마음은 풀어졌다. 물론 아내는 어떨지 모르지만 난 그랬다. 이번에도 굳이 다시 이야기를 꺼내는 것보다. 이렇게 흐지부지 넘어가는 게 더 편했다.
아내도 나도 엄청 피곤했다. 한 주의 피로를 제대로 풀지도 못했고 아내는 아내대로 시댁에서 육아하느라 고생이었고 (물론 시어머니, 시아버지의 도움이 있으니 수월한 것도 많지만, 시댁은 원래 아무리 편해도 불편한 곳인지라) 나는 나대로 잠도 못 잔 상태에서 부지런히 노느라 매우 피곤했다. 그렇게 피곤하면서도 1시가 넘어서 들어갔다. 자기 전 무려 15권의 책을 읽었다는 (할머니가 읽어줬다는) 소윤이도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고, 중간에 잠깐 깨서 한참 뒤척였다던 시윤이도 잘 자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소윤이는 지금 시윤이 정도였을 때도 엄마 아빠 나간다 그러면 막 울고불고 난리라서 꼭 재워 놓고 나갔던 것 같은데 시윤이는 그것도 다르네.
아무튼 이제 신과 함께 하나 남았다. 엄마 아빠 이것까지만 좀 보게 해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