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8.13(토)
어제 아이들이 자는 방에서 잤다. 서윤이 옆에 누워서 잤는데 역시나 기분은 좋았다. 매트리스가 너무 작아서 맨바닥에서 자느라 허리가 아프긴 했지만.
집에 먹을 게 너무 없었다. 장기판에서 왕을 호위하는 ‘사’처럼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하는 계란도 없었다. 반찬으로 먹일 만한 것이라고는 양념이 되지 않은 김과 볶음 김치 뿐이었다. 밥에다 김을 싸서 주고 볶음 김치를 반찬으로 주려고 하다가 차라리 김치 볶음밥을 하면 어떨까 싶었다. 서윤이는 원래 생각대로 김에다 싸 주고 소윤이와 시윤이에게는 볶음밥을 주면 될 듯했다.
“소윤아, 시윤아. 아빠가 김치 볶음밥 해 줄까?”
“네. 좋아여”
“조금 매울지도 모르는데 괜찮겠어?”
“네. 괜찮아여”
김치의 양을 잘 조절해야 했는데 너무 많이 넣었다. 볶아 놓고 보니 너무 빨갰다. 맛은 괜찮았는데 매콤하기도 했다. 일단 떠서 줬다.
“소윤아, 시윤아. 괜찮아? 안 매워?”
“조금 맵긴 한데 괜찮아여. 맛있어여”
잘 먹었다. 매운 게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 듯, 마치 계란 볶음밥처럼 잘 먹었다. 그러다 잠시 후 양상이 달라졌다. 숟가락을 놀리는 속도가 느려졌다. 숨소리는 더 거칠어졌고 커졌다.
“쓰읍. 하아. 쓰읍. 하아”
“소윤아, 시윤아. 너무 매워?”
“하아. 맵긴 한데 너무 맛있어여”
소윤이와 시윤이 둘 다 모두 비슷했다. 더디지만 숟가락을 놓지는 않았다. 끝까지 다 먹기는 했다.
“더 안 먹지?”
“더 먹고 싶기는 한데 매워서 못 먹겠어여”
서윤이는 밥에 김을 싸서 줬는데 엄청 잘 먹었다. 미안스럽게.
아내는 의외로 일찍 왔다. ‘아침’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한 시간에 왔다. 어제 엄청 늦게 자서 오늘은 함께 있어도 뭘 더 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왔다고 했다.
아내도 좀 쉬어야 했을 텐데 바로 바다에 갈 준비를 했다. 걸어서 바다에 가는 게 가능한 곳으로 이사를 왔는데 아직 작정하고 바다에 가서 물놀이를 한 적이 없었다. 발만 담그기로 하고 갔다가 몸을 다 적신 적은 있었다. 이러다 어느새 여름이 훅 갈 것 같아서 얼른 한 번 더 가야 할 것 같았다. 물놀이 용품이라고 할 만한 건 서윤이가 타는 보행기 튜브 정도였지만 갔다. 건강한 내가 곧 물놀이 용품이 되면 되니까.
수영복으로 갈아입히고 간단히 준비물을 챙겨서 바다로 갔다. 걸어서. 여행 와서 바다 가까운 숙소 잡고 놀러 가는 기분이었다. 날이 아주 뜨겁지는 않아서 물이 조금 차긴 했지만 들어가서 놀다 보면 금방 적응이 됐다. 튜브가 없는 게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서윤이가 잠시 모래밭으로 나가면 소윤이와 시윤이가 보행기 튜브를 타기도 했다. 난 물에 들어가서 아이들과 함께 놀았고 아내는 모래밭에서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캠핑 의자와 우산을 들고 갔는데 그게 아내의 소중한 쉼터가 됐다.
물놀이도 모래 놀이도 마음껏 했다. 서윤이는 정말 물을 좋아하나 보다. 겁도 없고 지치지도 않았다. 물이 꽤 차갑기도 했을 텐데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막 들어갔다. 저녁에 약속이 있어서 두어 시간 정도 놀고 돌아왔다. 자녀들이 전혀 아쉬워 하지 않은 걸 보면 실컷 놀기는 했나 보다.
걸어서 왔다. 너무 편했다. 바닷가 샤워기에서 간단히 모래만 씻어 내고 수건을 둘러 줬다. 그대로 집으로 왔다. 걸어서. 이게 엄청난 편리였다. 옷을 갈아입혀서 차에 태워야 하는 과정이 사라지니 이건 뭐 일도 아니었다. 아이폰이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의 혁신 같은 느낌이랄까. 집에 도착해서 바로 화장실에 아이들을 넣고 샤워를 시켰다. 바다 근처로 이사 온 게 실감이 나다가도 믿기지 않고 그랬다.
씻기고 나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먹을 게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집에 있는 면을 끌어 모아서 비빔 국수를 만들어 줬다. 다행히 다들 잘 먹었다. 하긴 시장이 반찬이었을 거다. 그렇게 물에서 놀았으니. 아내와 나는 라면을 먹었다. 서윤이는 먹는 둥 마는 둥 하길래 맨밥을 좀 줬는데 엄청 잘 먹었다. 또 미안스럽게. 서윤이가 맨밥 먹는 걸 보더니 소윤이와 시윤이도 달라고 했다. 이 녀석들도 잘 먹었다. 아무 반찬도 없이, 맨밥을.
“시윤아. 맨밥만 먹어도 맛있어?”
“네. 엄청 맛있어여”
“하긴. 쌀밥이 맛있긴 하지”
밥 먹고 나서 서윤이는 재웠다. 물놀이가 피곤했는지 눕자마자 잠들었다. 서윤이 말고 내가. 새삼 물놀이의 위력을 실감했다. 전 우주의 힘이 내 눈꺼풀을 끌어 내리는 느낌이었다. 완전히 잠들지 않고 깨서 나온 게 신기할 정도였다. 비몽사몽으로 정신을 차리면서
‘아, 이제 애들이랑 뭐 해야 되지?’
라고 고민을 하다가 문득 안도했다.
‘아, 맞다. 가영이 집에 있지’
연인과 부부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연인 시절에는 없던 든든함이 생기는 거라고 말하고 싶다. 이 엄청난 든든함은 어디서도 맛보기 힘들다.
서윤이가 깨는 걸 기다리면 너무 늦어질 것 같아서 자는 서윤이를 차로 옮겼다. 다행히 깨지는 않았다. 모두 타고 출발하려고 하는데, 지난 번처럼 시동이 안 걸렸다. 몇 번 더 시도해 봤지만 걸릴 리 만무했다. 아내와 마주 보며 허탈한 표정을 나눴다. 아내는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상황을 얘기했고 결국 아내 친구네 가족이 우리 집 근처 쪽으로 오기로 했다. 서윤이는 다시 유모차로 옮겼다. 다행히 계속 잤다.
우리는 걸어서 약속 장소로 갔다. 요즘 내가 가장 좋아하고 있는 ‘대왕암 공원’이었다. 역시나 많은 사람들이 대왕암을 향해서 부지런히 걷고 있었다. 우리는 그 행렬에서 살짝 벗어난, 대부분 시선을 돌리지 않는 숲속에 자리를 잡았다. 역시 한산했다. 에어팟의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자연으로 옮겨 놓은 거라고 하면 좀 이해가 되려나.
엄청 오랜만에 만나는 거였다. 서로의 자녀들은 어제도 본 것처럼 잘 어울려 놀았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물놀이를 하고 왔는데도 체력이 남았는지 열심히 뛰어다녔다. 대단한 체력이었다. 한 번씩 비가 내리기는 했는데 다행히 빗발이 굵어지지는 않았다. 덕분에 습도만 높아져서 자녀들 모두 땀을 뻘뻘 흘렸다. 우리가 앉은 자리에 사람은 없었는데 모기는 많았나 보다.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모기에게 피와 살을 내줬다.
꽤 한참 있었다. 서윤이는 엄청 오래 자고 깼다. 무려 세 시간이나. 아내가 밤을 걱정하며 중간에 깨우려고 하기도 했는데 그냥 두라고 했다. 30분 자고 일어날 거 아니면 한 시간을 자든 두 시간을 자든 세 시간을 자든 비슷하다. 차라리 현재의 안락을 누리는 게 낫다.
아내 친구의 가족은 우리 집에 들렀다. 차로 한 시간 반이나 가야 하니 아예 잘 준비를 해서 갈 생각으로 아이들을 모두 씻겼다. 아내 친구와 남편도 씻었다. 어른들은 모두 배가 안 고파서 따로 저녁을 안 먹었고 아이들만 치킨을 한 마리 시켜줬다. 그냥 저녁 대용으로, 배고픔만 달래라고 시켰는데 다들 또 어찌나 잘 먹던지. 치킨으로는 턱도 없이 부족해 보였다. 그렇다고 집에 먹을 게 있지도 않아서 남은 식빵에 잼 발라 주고, 복숭아와 사과를 깎아서 줬다.
집에 와서도 다들 깔깔거리며 잘 놀았다. 차로 한 시간 반이니 엄청 가깝다고 하기도 어렵고 행정 구역 상으로도 완전히 다른 도시라 먼 느낌이지만, 이사 오기 전을 생각하면 지척이나 마찬가지였다. 빠른 시일 안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면서 헤어졌다.
우리도 아이들을 미리 씻겨서 바로 취침이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아마 눕자마자 잠든 것 같았고, 서윤이는 몇 번 거실에 등장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한 번도 안 나타났다. 세 시간이나, 그것도 늦은 시간에 자서 아내도 나도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잘 잠들었나 보다.
아내도 나도 무척 피곤했지만, 언제나처럼 바로 자지 않았다. 습관성 주말 야간 취침 거부증이 발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