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8.20(토)
지난 밤에 잠을 설쳤다. 아내도 나도 서윤이도.
“여보. 서윤이 열 나네”
“아 그래? 몇 도야?”
“몇 도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래도 꽤 뜨겁네”
“그렇구나. 어제 그래서 그렇게 칭얼거렸구나”
열이 나고 몸이 불편한 서윤이는 잠을 제대로 못 이뤘고 아내와 나도 깊은 잠에 들기 어려웠다. 아침이 밝았을 때도 서윤이는 여전히 열이 났다. 그러다 어느새 열이 떨어졌다가도 다시 오르고 그랬다. 변하지 않는 건 서윤이의 무지막지한 짜증이었다. 그야말로 뭐든 걸리는 대로 다 짜증의 소재가 됐다. 아내와 나는 물론이고 소윤이와 시윤이도 아프다는 걸 감안해서 너그럽게 받아줬지만, 아무리 그래도 쉬지 않고 들려 오는 짜증 섞인 울음 소리를 인내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나마 짜증만 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토를 하거나 설사를 하거나 너무 축축 늘어지기만 하거나 그랬으면 오히려 걱정을 더 많이 했을 거다. 짜증 내고 호통 칠 기운이 남아 있다는 건 한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하나도 아프지 않고 멀쩡한 것도 다행이었고. 시윤이는 셋 중 가장 개운해 보였다. 다른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까불거림’을 계속 발사했다.
주말이었지만 소윤이, 시윤이와 뭔가 특별한 걸 하지는 못했다. 날씨도 궂었다. 비가 추적추적 계속 내렸다. 먹고 싶은 거라도 좀 해 주고 싶어서 뭘 먹고 싶냐고 물어봤더니 소윤이는 김치볶음밥, 시윤이는 떡만둣국을 얘기했다. 어쩜 그렇게 딱 아빠 수준에서 가능한 음식으로 잘 골랐는지. 점심에는 김치볶음밥, 저녁에는 떡만둣국을 먹기로 했다.
서윤이는 낮잠을 꽤 일찍 재웠다. 너무 계속 짜증을 내니까 일단 재워보자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정오가 되기도 전에 아내가 서윤이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서윤이는 꽤 금방 잠들었고 아내도 잠들지 않고 다시 나왔다. 서윤이가 자니 잠시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내 숨통이 아니라 우리 집 전체의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 틈을 이용해 모두 점심을 먹었다. 지난 번에 너무 맵게 만들어서 이번에는 김치를 씻어서 넣었다. 그랬더니 너무 너무 심심한 김치볶음밥이 됐다. 소윤이는 그것도 맛있다고 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까지 제가 먹어 본 볶음밥 중에 제일 맛있어여. 너무 맛있다”
그런 말을 하면 아빠가 좋아한다는 걸 알고 일부러 골라서 하는 걸까. 소윤이는 극찬을 계속 하며 맛있게 먹었다. 지난 번에 너무 매워서 고생한 시윤이도 오늘은 조금도 힘들어 하지 않고 잘 먹었다. 시윤이도 ‘아빠는 볶음밥 같은 걸 잘한다’며 아빠를 칭찬했다.
서윤이는 생각보다 빠르게 잠에서 깼다. 심지어 ‘자고 나면 좀 괜찮아 질지도 몰라’라는 우리의 기대를 산산조각 냈다. 화산이 폭발하듯 울며 소리를 지르고 짜증을 냈다. 아파서 그렇다는 걸 알아도 힘들 정도였다. 결국 아내가 다시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는데 꽤 금세 조용해졌다. 이번에는 아내도 나오지 않았다. 서윤이가 충분히 못 자고 깨서 그랬나 보다.
아내와 서윤이가 자는 틈을 이용해 소윤이, 시윤이를 데리고 밖에 나갔다 왔다. 서윤이가 있었으면 자기 상태는 생각 못하고 무조건 따라간다고 난리가 났을지도 모른다. 오늘은 서윤이의 눈을 피하는 게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였는데, 다행히 잘 성공했다.
여전히 비가 내렸다. 그래도 우산을 쓰고 걸을 만한 수준이라 우산을 펴고 걸었다. 우선 약국에 가서 서윤이 해열제를 샀다. 그 다음으로는 소윤이와 시윤이가 오며 가며 보기만 하고 다른 친구에게 듣기만 해서 너무 가 보고 싶어 하던 문구점에 갔다. 둘은 한참을 구경했다. 양상은 달랐다. 특히 소윤이는 뭘 살 지 엄청 오래 고민했다. 나에게 후보를 주고 어떤 게 더 나은지 물어보는 것도 아내와 똑 닮았다.
소윤이는 작은 자물쇠와 아주 작은 다이어리(장식용에 가까운)를 하나씩 샀다. 시윤이는 옷 입히기 스티커를 샀다. 둘 다 자기 용돈으로 사는 거라 의사 결정 과정에 내가 조금도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장난감은 안 된다’는 대원칙만 지키면 뭐든 가능했다. 어떻게 해야 가치 있는 소비를 할 수 있는지 가르쳐 주고 싶지만, 그건 일단 나부터 그렇게 살아야 좀 더 설득력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떡과 만두를 샀다. 아내와 서윤이는 여전히 자고 있었고, 우리가 들어간 지 얼마 안 돼서 깼다. 서윤이는 아까처럼 일어나자마자 짜증을 터뜨리지는 않았다. 밥도 잘 먹었다. 밥을 잘 먹는 것도 다행이었다. 아무리 아파도 잘 싸고 잘 먹으면 금방 회복될 거다. 잘 먹고 잘 싸기 힘들 정도로 열이 나고 그러지 않아서 감사했다.
커튼이 도착했다. 거실의 삭막함을 몰아낼 소중한 소품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그것도 아내에게서 떨어지지는 않으면서 짜증은 있는 대로 끌어다 모으는 듯한 서윤이와 함께 있을 때 설치하는 건 다소 어려운 일이긴 했다. 그래도 일단 시작했다. 거실과 각 방에 모두 설치를 해야 했는데 일단 거실이라도 끝내 보자는 심산이었다.
역시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상황을 봐 주지 않고 짜증 지뢰를 심어 놓는 서윤이와 호기심에 가득 차서 순수한 마음으로 접근하지만 본의 아니게 방해가 되는 소윤이와 서윤이까지. 거실 커튼 하나 다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다 마치긴 했다.
저녁에는 식사 약속이 있었다. 커튼을 설치하고 나니 떡국 만들 시간이 빠듯했다. 그냥 아내에게 만들어 주라고 하고 나갈까 싶었는데 아무리 봐도 아내가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서윤이는 아내에게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아내가 조금이라도 멀어지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저녁 한 끼 차리다 아내의 혼과 육이 탈탈 털릴 것 같았다. 서둘러서 떡국을 끓였다. 다행히 막 끓인 것치고는 간이 잘 맞았다. 아내와 아이들이 막 식탁에 앉았을 때 집에서 나왔다.
“얘들아, 아빠 갈게. 저녁 맛있게 먹고 잘 자?”
“네. 아빠 내일 아침에 보자여”
틈틈이 집안일도 해서 아내가 크게 할 일은 없었다. 그나마 마음이 가벼웠다.
저녁 모임은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장소도 집에서 엄청 가까운 곳이었다.
“여보. 뭐해?”
“아, 책 읽고 있어요”
“아 그렇구나. 여보 커피 한 잔 사 갈까?”
“너무 좋지”
커피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은 아직 잠들기 전이었다. 방으로 들어가서 한 명씩 인사를 하고 뽀뽀를 했다. 서윤이는 얌전했다. ‘잘 때가 제일 천사 같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여러 모로.
서윤이가 잠들 때는 얌전했지만 잠들고 나니 오히려 포악(?)해졌다. 코가 막히고 몸이 쑤셔서 깊이 잠들기 어려웠는지 자주 깨서 울었다. 그냥 우는 게 아니라 엄청 신경질을 내면서 울었다. 아프지 않았으면 한 차례 훈육을 했을 법한 모습이었지만 오늘은 당연히 그런 일은 없었다. 몇 번을 깼다. 울음 소리도 평소에 들어 본 적 없는 새로운 느낌이었다. ‘괴로움’이 묻어 있는 얇고 가는 흐느낌 같은 게 섞여 있는 울음이었달까. 아무튼 불쌍했다. 하루 종일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연초에 입원했을 때 딱 그 얼굴이었다. 퉁퉁 붓고 혈색도 안 좋고. 그만큼 안 좋았다.
일단 열은 안 나서 다행이기는 한데, 자고 일어나면 싹 나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