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갑자기?

22.08.31(수)

by 어깨아빠

장모님이 오시기로 했다. 아이들에게는 비밀이었다. 아침 이른 시간에 비행기를 타고 오신다고 했다. 공항에서 집까지 택시를 타고 오신다고 했다. 아이들이 완벽하게 깜짝 놀랄 수 있도록. 난 출근하고 현장에 없었지만 상상이 됐다. 그 아침부터 비행기를 타고 400km를 날아 오시는 장모님의 설렘과 정말 뜬금없이 할머니를 마주한 아이들의 표정이 그려졌다.


안타깝게도 장모님과 아이들의 만남의 순간이 어땠는지 전해 듣기도 전에, 아내의 탄식(?)부터 듣게 됐다. 장모님은 진작에 오셨고 점심을 먹으러 밖에 나가려고 했던 모양인데 시윤이가 갑자기 차를 안 타고 싶다면서 버텼다는 거다. 특별히 기분이 안 좋았던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갑자기 차가 타기 싫다면서 억지를 부렸다고 했다. 아내는 그냥 팍 짜증이 났나 보다. 그런 상황과 그런 시윤이의 모습에. 내가 시윤이와 통화를 했다.


시윤이는 벨트가 너무 불편해서 타기 싫다고 했다. 다른 이유가 있으면 그걸 말해야 한다고 했더니 다른 건 말하지 않고 정말 벨트가 불편해서 그렇다고 했다. 시윤이에게 일단 당장은 어떻게 할 수 없으니 오늘은 불편해도 그냥 참고 타라고 했다. 나중에 아빠가 벨트를 보든지 자리를 바꾸든지 해 볼 테니 일단 오늘은 참고 가 보라고.


시윤이는 걸어가면 되지 않느냐, 차 타고 3분밖에 안 걸리니까 엄청 짧아서 걸어갈 수 있지 않느냐, 지금은 비가 안 오니까 걸어가도 되지 않느냐며 나름의 주장을 펼쳤다. 시윤이가 했던 말에서 하나를 골랐다.


“그래, 시윤아. 3분밖에 안 걸리는데 그걸 못 참아? 오늘은 시윤이가 좀 참고 타”


시윤이는 내키지 않는 듯 대답을 하고 일단 그러겠다고 했다. 일단 시윤이의 마음을 읽어 주고 해결이 가능한 문제였다면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그게 아닌데도 계속 고집을 부렸으면 자기 뜻대로 하게 하고 현실(자기만 집에 남는)을 받아들이게 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었을까. 어쨌든 오늘은 현실을 받아들이게 하는 게 불가능해서 선택의 여지가 없긴 했다. 오늘은 이렇게 넘어갔지만 다음에도 또 이럴 수 있다. 그저 벨트의 문제가 아니라 문제 해결 경험의 문제랄까(거창하기도 하다). 아무튼 덕분에 아내는 기분을 잡친 것 같았다. 30분 정도 지나고 아내에게


“잘 나갔어?”


라고 물어봤더니 굉장히 떨떠름한 대답이 돌아왔다.


“응. 뭐 그랬어”


오후에는 나가서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장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집에는 내가 먼저 들어왔다. 잠깐 누웠다가 일 좀 더 하려고 했는데 소파에 누워서 그대로 잠들었다. 물에 빠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것처럼 잠에서 깨려고 애를 쓴 기억이 어렴풋하게 났다. 한 시간 정도 잤나 보다. 아내와 장모님, 아이들이 들어오는 소리에 잠을 깼다.


아내와 장모님은 저녁에 데이트를 하러 나가기로 했다. 다행히 아이들에게는 아내가 미리 말을 해 놔서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충분했다. 마음이 정리가 안 됐겠지만. 아내에게 듣기로는 처음 얘기했을 때 소윤이가 가장 아쉬움을 많이 표현했다고 했다. 막상 헤어지는 순간에는 서윤이가 제일 아쉬워했다. 소윤이는 속으로 삼키지 않았을까 싶다.


저녁은 장모님이 해 오신 반찬으로 간단하게 먹었다. 샤워도 안 해도 되는 날이었다. 혼자 돌보는 시간치고는 굉장히 여유로웠다. 기쁜 마음으로 책도 읽어주고 장난도 받아줬다. 오늘따라 서윤이도 아주 순순하게 누워서 잠들었다.


데이트를 마치고 돌아온 아내의 ‘수고했다’는 격려가 무안할 정도로 힘들지 않은 독박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