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덕분에 나들이

22.09.06(화)

by 어깨아빠

아주 이른 아침에 바람이 좀 세차게 불었다. 여기저기서 예보하는 태풍의 위력에 비하면 다소 시시해 보였다. ‘아직 때가 안 됐나?’라고 생각하며 여전히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는데 해가 뜨기 시작했다. 다소 허무하기는 해도 큰 피해 없이 지나가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다만 강력한 태풍에 대비해 출근을 안 하고 집에 있었는데 너무 조용히 지나가는 듯해서 혼자 민망했다.


여덟 시쯤 되니 날씨가 엄청 좋아졌다. 태풍이 잠잠하게 지나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언제 태풍이 왔었나 싶을 정도로 화창하고 맑았다. 오전에는 일을 했다. 아내는 아이들에게


“얘들아. 아빠는 일하시는 중이야. 그러니까 아빠는 없다고 생각해. 아빠한테 가서 자꾸 말 걸지 말고. 알았지?”


라고 얘기했다. 아직 따로 책상이 없기 때문에 식탁에 앉아서 일을 했다. 아이들도 내 옆에 앉아서 아침을 먹었다. 아침을 먹고 난 뒤, 아이들의 일과는 성경읽기와 필사, 학습 등이었다. 아내가 나에게 얘기했다.


“여보. 혹시 시윤이 성경 좀 같이 읽어 줄 수 있나요?”

“아니요”

“아, 네”


2-3분 있다가 시윤이를 불렀다.


“시윤아. 성경책 가지고 와. 같이 성경 읽자”


뭐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 정도도 안 하는 건 재택 근무자의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시윤이와 성경을 읽으면서 평화가 깨질 때가 많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 시윤이가 다소 힘겨워 하는 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잘 참는 것도 느껴졌다. 평소에 아내와 함께 있을 때는 그걸 참지 못하고(혹은 참지 않고) 바로 표출해 버리나 보다. ‘아빠가 있으면 천사가 된다’는 아내의 말이, 오늘도 그대로 실현됐다. 이러다 언젠가 무서운 아빠로 거부당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막연히 두려울 때도 있다.


“여보. 서윤이 기저귀 좀 갈아 줄 수 있나요?”

“아니요”

“아, 맞다. 엄마도 자꾸 아빠한테 부탁하게 되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는 건 쉽지 않다. 그 존재자가 남편이라면 더더욱. 그래도 아내의 적극적인 협조 덕분에 방해받지 않고 집중했다. 아내가 나중에 얘기하기로는, 아이들도 평소에 비하면 무척 평화로웠다고 했다.


“아빠가 아무것도 안 하고 있기만 해도 다르네?”


점심은 밖에서 먹었다. 집 근처의 국수가게였다. 이전에 아내와 아이들만 가 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아내는 그냥 그렇다고 했는데 소윤이는 엄청 맛있다고 했다. 오늘 가 보니 그럭저럭 괜찮았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정말 맛있는지 잘 먹긴 했다. 다 먹었을 때쯤 K네 가족에게 연락이 왔다. 함께 나들이를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안 그래도 밥 먹고 나서는 바람을 쐬러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날씨가, 도저히 나가지 않고서는 버티기 어려울 정도로 좋았다.


차는 두고 걸어서 갔다. K의 첫째와 둘째는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가고 없었다. 막내만 데리고 왔는데 뭔가 허전한 기분이었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조금 심심해 하는 것 같기도 했고. 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카페로 갔다. 카페까지 가는 동안 꽤 걸었는데,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한 순간도 감탄을 멈추지 않았다. 눈에 맺히는 곳곳이 다 아름다웠다. 그런 날씨였다. 마침 서윤이도 유모차에서 잠들었다. 바람은 여전히 좀 세서 파도가 거칠었다. 딱 감상하기 재미있고 좋을 정도로 소리를 내면서 부서졌다. 카페에서 나와 방파제 길을 걸었다. 그때 K의 첫째와 둘째도 합류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데려다 주셨다.


파도가 들이치는 바위 위에 올라가 파도를 보는 아이들을 보니 흐뭇했다. 뿌듯했다. 자연과 부쩍 가까워진 삶의 변화를 향한 기쁨도 언젠가는 무뎌지겠지만, 아직까지는 너무 좋다. 내가 누리는 것도 자녀가 누리는 것도 모두. 아이들은 한참 동안 파도 구경을 했다. 다시 돌아서 나오는 길에는 조개껍질을 주워 모으면서 놀았다. 저녁은 우리 집에서 먹기로 했다. 집으로 오는 길에도 공원에 들러서 놀았다.


집에 와서도 놀았다. 저녁 먹기 전에도 놀았고 먹고 나서도 놀았다. 그렇게 놀았는데도 K의 첫째는 집에 가자고 하니 많이 아쉬웠는지 무척 서운해 했다. 떠나는(?) 입장이라 더 그랬나 보다. 오히려 소윤이와 시윤이는 담담했다.


밤에도 날씨 덕을 많이 봤다. 너무 시원했다. 아내와 둘이 나가서 산책을 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