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이 내려앉은 죽천항에서

22.09.08(목)

by 어깨아빠

어제 아내와 통화를 할 때(아내가 시윤이와의 일로 매우 힘들었을 때), 자기 선에서는 어떻게 못 하겠으니 ‘이따가 밤이나 내일’ 꼭 훈육을 해 달라고 했다. 아내가 말하는 훈육이라는 건, 아주 강력한 단계를 말하는 거였다. 그러기로 했는데 어제도 마땅한 순간이 없었고 오늘 아침에도 마찬가지였다. 잊은 건 아니었는데 기분 좋은 시윤이를 불러서 어제 일을 얘기하며 훈육을 하는 게 좀 이상했다. 그 방법 자체가 맞는 건지도 확신이 없었고, 맞다 하더라도 나에게 오령이나 지혜가 없었다. 유야무야 넘어갔다. 시윤아, 땡 잡았네?


포항에 갈 일이 있었다. 오전에는 집에서 일을 하고 점심시간 쯤 포항으로 출발했다. 아내와 나도 처음 뵙는 목사님 부부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목사님 부부도 자녀가 네 명이었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둘째(10살)만 있었다.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같이 놀라고 얘기를 했지만 역시나 둘 다 쭈뼛거리면서 우리가 있는 곳에 있었다. 그림도 그리고 책도 읽고, 목사님 부부가 준비해 주신 간식도 먹었다. 초코송이를 비롯한 여러 금단의 간식(?)이 있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머뭇거렸다. 오히려 서윤이가 거침없이 이것도 달라, 저것도 달라 그러면서 덤볐다. 보통 이럴 때는 적당히 먹인다. 아예 안 먹이는 건 준비해 주신 분들이 민망해 할 지도 모르고, 그렇다고 막 먹이는 건 우리 집의 규칙에 어긋나니 적당히 먹도록 허용한다. 대체로 소윤이와 시윤이도 적정한 선에서 먹고 끝내고. 아직 뭘 모르는 서윤이만 감사를 모르고 ‘더’를 외친다.


이야기가 꽤 길었는데도 소윤이와 시윤이는 자리를 뜨지 않고 계속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었다. 나중에 목사님 부부의 나머지 자녀들도 다 왔는데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잠시 옥상으로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를 나눌 때, 그제야 조금 입이 트이고 대화를 나눴다. 그것도 소윤이는 거의 그렇지 않았고 시윤이만 조금 그랬다. 역시나 서윤이는 거침이 없었다. 막 말했다. 아직 어려서 그런 건지는 모르지만 셋 중에 가장 자신감이 넘쳐 보인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그 나이였을 때를 떠올려 봐도 서윤이가 더 패기가 넘친다. 막내로서 사랑을 먹고 자란 결과인가.


목사님 부부께서 저녁을 먹고 가라고 권하셨지만, 괜히 부담을 드리는 것 같기도 하고(입이 다섯 개라) 온 김에 잠시라도 구경이라도 하려고 정중히 사양했다. 사실 우리가 사는 곳도 바다고 포항도 바다라 새로운 풍경을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그래도 포항까지 갔는데 바로 돌아오는 건 너무 아쉬웠다. 아무리 비슷하다고 해도 자연은 다 다르다. 각각의 자연과 풍경이 주는 영감과 감동이 다르다고 믿는다. 경험하고 있다. 포항으로 갈 때도 너무 멋진 경치를 많이 봤다. 해안 도로를 따라 올라왔는데 기가 막힌 날씨에 어울릴 만한 해안 풍경이 계속 이어졌다.


근처에 ‘죽천항’이라는 곳이 있었다. ‘포항 가 볼 만한 곳’을 검색했을 때 나오지 않는 곳이라 매력적이었다. 가깝기도 했다. 작은 항구였다. 카페나 식당이 별로 없었다. 관광지로 각광받는 곳은 아닌 것 같았다. 몇 개 없는 식당 중에 하나를 골라서 들어갔는데 밑반찬과 함께 나오는 매운탕이 너무 맛있었다. 다음에 또 갈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또 가게 된다면 제대로 된 매운탕을 먹어 보고 싶었다. 아이들은 전복죽과 미역국을 먹었다. 짧은 기간에 너무 자주 먹는 것 같아서 미안해 하다가도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누구는 먹고 싶어도 못 먹는 전복을 자주 먹으면 감사해도 모자랄 일이다. 몸에도 좋고. 미안해 하지 않기로 했다. 고맙게도 소윤이와 시윤이 모두 아주 잘 먹었다.


저녁을 먹고 바닷가를 조금 걸었다. 우리가 사는 곳의 바다와 비교하면 훨씬 한적했다. 역시 다른 매력이 있었다. 비슷한 바다 풍경이어도 분명히 다른 경험을 준다. 그림에서나 보는 풍경이었다. 바다 위로 달빛이 촤악 내려앉는. 요즘은 자연과 가까워지고 많이 봐서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쉽다. 벌써 여덟 살, 여섯 살이 된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더 일찍 이런 경험을 제공하지 못한 게 너무 아쉽다. 그래서인지 어디를 가도 약간 호들갑을 떨게 된다.


“와. 소윤아, 시윤아. 저기 봐봐. 달 너무 멋있지 않니? 바닷물에 비치잖아. 저거 너무 예쁘다. 그치? 나중에 소윤이랑 시윤이가 저런 거 그림으로 그려 보면 너무 좋겠다”


바람이 찼다. 나에게는 무척 시원한 바람이었지만 아내에게는 찬 바람이었다. 산책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그래도 좋은 풍경을 배경으로 가족사진도 찍었다. 지나가시던 중년의 부부께서 먼저


“가족사진 찍어드릴까요?”


라고 물어보셨다. 알고 보니 아까 식당에서도 우리를 보셨다고 했다. 아이들이 너무 예뻐서 계속 봤는데 또 만나서 반갑다고 하셨다. 역시. 아이들을 데리고 다녀서 손해 보는 게 없다. 득을 보면 봤지.


꽤 늦은 시간에 집에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소윤이와 시윤이를 씻기지 못했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늦고, 더 피곤했다. 그래도 씻겨야 했다. 아직 여름인데, 이틀이나 샤워를 안 하는 건 과장을 보태자면 ‘학대’였다. 대신 아내가 수고했다. 난 쓰러져서 정신을 잃었고 아내가 아이들을 모두 씻겼다. 책도 읽어 주려고 고르라고 했는데 그것도 아내가 읽었다.


“여보. 미안”

“아니야. 아무렇지도 않아”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다. 엄청 피곤했을 거다. 감정적으로 아무렇지 않다는 뜻이었을 거다. 아내는 집안일도 많이 했다. 내일부터 연휴다.


여보, 이제 내 차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