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라는 여과지가 없을 때

22.11.01(화)

by 어깨아빠

아내는 내가 없을 ‘오늘’을 두려워 했다. 어제도 소윤이와 시윤이가 숱한 짜증과 다툼을 보였지만 내가 있었던 덕분에 그나마 아내의 감정이 잘 조절됐다(표현이 좀 이상하지만, 아이들도 자제하고 아내도 한 발 뒤로 물러설 수 있었다는 뜻이다). 오늘은 아내가 홀로 어제와 비슷한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침부터 여과 없이 발산되는 시윤이의 짜증과 여기저기서 들리는 티격태격 소리에 아내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시윤이와 서윤이는 그렇다고 해도 소윤이까지 평소에는 없던 고집을 부렸다.


원래 점심을 먹고 나면 지난 번에 우리 가족끼리 밤에 가서 줄넘기를 했던 공원에 가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점심이 늦어졌다고 했다. 가려고 했던 공원에 가기에는 시간이 촉박해져서 다른 곳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동선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는 공항 근처에 있는 어딘가를 가는 게 좋았는데 공항 근처에는 그런 곳이 별로 없다는 게 문제였다. 내가 한 군데를 추천했다. 별 거 없고 그냥 넓은 공터에 가까운 공원이었다. 아이들이 뛰거나 조카가 걷기에 좋은 곳이었다.


아내와 통화를 할 때마다 아내의 ‘억누름’이 느껴졌다. 시윤이의 떼가 선을 넘은 지 오래 됐다고 했다. 이동할 때마다, 어딘가에 멈출 때마다 짜증을 냈다고 했다. 아내와 아이들, 형님네가 가기로 한 곳이 내가 있던 곳 근처였다. 유모차를 전해 주느라 잠깐 만났는데 다들 웃음이 없어 보였던 건 나의 착각이었을까.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손님으로 왔는데 초강력 육아만 하고 가는 게 아닌가 싶었다. 사실 공원도 아이들, 정확히 말하자면 소윤이와 시윤이 때문에 가는 거였다. 소윤이와 시윤이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되긴 했다.


나도 일을 정리하고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합류했다. 다들 카페에 들를 시간도 없어서 커피도 못 마셨다고 했다. 커피를 사서 갔다. 막 도착했을 때 다들 정리하고 가는 분위기였다. 아이들 외숙모의 비행기 시간이 임박해서 가야 했다. 아내와 통화를 할 때는 ‘소윤이와 시윤이가 숙모는 먼저 보내고 자기들은 공원에서 더 놀면 안 되냐’고 했다고 하길래, 아무리 어려도 그건 손님을 맞이하는 태도가 아니라고 가르쳐 주려고 했는데, 막상 도착하니 함께 공항으로 간다고 했다. 형님네 부부는 각각 자기 집과 친정으로 간다고 했다. 형님의 비행기 시간이 더 늦어서 함께 저녁을 먹을까 했는데, 형님이 혼자 있어도 된다며 한사코 거절을 했다고 했다. 초강력 육아에 지쳐서 잠시라도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무척 작고 아담한 공항이지만 검색대가 선사하는 특유의 이별의 감정은 똑같다. 아이들 외숙모와 조카가 먼저 떠났다. 형님은 한 시간 정도 더 시간이 있었지만 거기서 인사하고 헤어졌다. 왠지 혼자 있고 싶어 보였다.


살 게 있어서 공항 근처의 문구점과 잡화점에 들렀다.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있었고 난 잠시 따로 다녔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는데 그때도 시윤이는 아내를 괴롭게 했다. 아내도 참지 못하고 나에게 바로 전화를 했다.


“여보. 어디야?”

“나? 여기 옆에 문구점”

“어, 빨리 가야겠어요. 시윤이가 너무 말을 안 들어서 있을 수가 없어요”


막상 만나니 그럭저럭 괜찮았다. 저녁에는 교회에 가야 해서 밥은 밖에서 먹었다. 교회 근처로 가서 먹으려고 했는데 역시나 시간이 촉박해져서 그냥 공항 근처에서 먹었다. 저렴하고 아이들과 먹기 좋은 국수 종류를 파는 곳이 있었다. 전혀 모르는 곳이었는데 의외의 맛집이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피곤한 와중에도 잘 먹었다. 당연히 내가 제일 잘 먹었고.


시윤이는 교회에 도착해서 앉자마자 잠들었다. 눕히려고 했는데 안 눕겠다면서 약간 정신을 차렸다가 다시 잠들었다. 소윤이도 잠들었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아내도 잠들었다. 흔한 일이었다. 난 전혀 안 졸렸는데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한 순간 잠들었다. 역시나 흔한 일이었다. 졸았다고 해야 정확하겠지만 그 정도 졸았으면 그냥 잤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한 게 아닌가 헷갈린다.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는 씻기지 않고 재웠다. 집에 도착해서 깨긴 했지만 다들 너무 피곤해 보였다. 사실 아내와 내가 피곤해서 약간 귀찮기도 했다. 뭐 하루 안 씻는다고 큰 일 나는 건 아니니까.


아, 난 드디어 깁스를 풀었다. 너무 편하고 좋았다. 마치 새롭게 한 팔을 얻은 기분이었다. 통증은 아직 남아 있지만 그래도 좋았다. 한동안 열외였던 여러 집안일에도 적극적으로 복귀해야 하지만 그것도 괜찮았다.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도 두 팔이 된 아빠를 어색해 했다.